너는 누구냐?
발렌틴 그뢰브너 지음. 김희상 옮김. 청년사 펴냄.1만8000원
발렌틴 그뢰브너 지음. 김희상 옮김. 청년사 펴냄.1만8000원
잠깐독서
“너는 누구냐?”
이 책은 다짜고짜 불심검문한다. 지갑을 헤집어 ‘민증’을 까보란 말인가. 플라스틱 카드에 적힌 13자리 숫자가 ‘나’다! ‘미간은 넓고 눈썹은 짙으며 팔등에 왕점을 지닌 사람’이라는 토를 달지 않아도 식별번호는 간단히 ‘나’를 나이게 한다. 신분증이 없으면 안면 있는 은행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외여행 중 여권을 잃어버리면 드골공항 1번 터미널에서 15년 동안 산 남자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신분증은 언제부터 ‘나’를 대신해 위력을 떨쳤을까? 지문 채취도 사진기술도 없던 시절에는 ‘나’를 어떻게 증명했을까? 책은 신분증을 둘러싼 중세의 흔적을 추적해 들어간다. 여권의 휘장과 수배전단에 열거된 신체 특징은 몸과 기호로 변별했던 중세에서 단서로 삼는다.
공권력이 보증하는 신분증은 처음부터 ‘관리’ 목적으로 생겨났다. 최초 인명부는 ‘고해성사 증명서’로 고해성사 여부를 확인하는 검표였다. 15세기에는 군대 용병수를 부풀려 급료를 착복할까봐 통제할 요량으로 병사 신분증을 발부했다. 예외일 때만 발급하던 신분증은 중세 말 통행 허가증으로 대체되면서 ‘의무’로 바뀐다. 관청의 관인이 찍히고 바야흐로 개인의 모든 움직임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지배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문장을 찍는 스탬프, ‘공무 수행중’이라는 비표, 구걸을 해도 좋다는 허가증, 페스트 위생증 등 신분증 기원에 얽힌 이야기(1∼6장)는 중세 미시사로 읽힌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라고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마지막 8장만 봐도 무방하다.
신분 증명의 역사를 거꾸로 되짚어 나오면 복제기술의 역사와도 맞닥뜨린다. 진짜를 확인하려 들수록 가짜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것은 아이러니. 불법도용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고 급기야 생체인식 전자주민증 도입 논란까지 인다. 책을 덮으면 반문하게 된다. ‘플라스틱 카드의 주인은 진정 나인가.’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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