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위기-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안병진 지음/모던아카이브·1만8000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4월과 5월, 9월 세 차례 판문점과 평양에서 만났고 함께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다.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을 했다. 한반도에서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그러나 이후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처를 둘러싼 북-미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최근엔 미국이 인권 문제를 끄집어내 압박하자 북한이 반발하는 등 불안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미국 정치를 전공한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최근에 낸 <예정된 위기>에서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례가 존재한다”며 “미국과 쿠바 사이에 벌어졌고, 또 아직도 진행 중인 ‘쿠바 미사일 위기’다”라고 말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소련이 미국의 턱밑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사실이 들통나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사건이다. 한반도 위기를 “느리게 진행되는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일부 전문가들이 말하듯 북-미 관계가 쿠바-미국 관계와 닮았다고 한다.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점도 비슷하다.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뿌리와 ‘13일 동안의 위기’, 그리고 위기 이후 쿠바-미국 관계를 정치 지도자들의 고정관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한반도에서 평화 공존의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교훈을 찾아본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카리브해에서 미국 해군 정찰기와 구축함(아래)이 소련 상선(위)을 추적하고 있다. 미 해군항공박물관 제공
책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베두인 전설’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2002년 칼럼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의 전설을 언급한 데서 안 교수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늙은 베두인족 족장이 칠면조를 사서 매일 먹이를 주며 정성껏 키웠다. 어느날 누군가가 칠면조를 훔쳐갔다. 족장은 아들을 불러 큰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아들은 그깟 칠면조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떠는 아버지를 무시했고, 결국은 낙타까지 도둑 맞았다. 족장은 다시 칠면조를 찾아오라고 다그쳤지만, 아들은 칠면조에 집착하는 아버지의 말을 계속 무시했다. 결국 몇 주 후 족장 아들의 딸이 강간을 당했다. 족장은 아들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모든 건 바로 칠면조 때문이다. 칠면조를 훔쳐갈 수 있다는 걸 놈들이 알았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안 교수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나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 정책결정자들이 가졌던 ‘사소한 문제에서 약하게 보이면 결국 모든 걸 잃는다는 강박’이 오인과 오판을 불러 위기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한다. ‘베두인 전설’은 한반도는 물론 다양한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사고의 틀이라고 짚는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나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싱가포르 정보통신부 제공
또 하나의 열쇳말은 ‘베를린 대전략 가설’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는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배치한 목적이 미-소 대결의 사활적 전장인 베를린을 장악하려는 큰 전략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흐루쇼프는 쿠바와 베를린을 연계시키려는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이 논리적으로 결론 내린 상대방의 숨겨진 전략’을 상대방의 행위 목적이라고 ‘합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오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뿌리와 맥락을 알아야 한다며, 쿠바·소련·미국이 어떻게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는지 조명한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쿠바를 ‘가족’에 비유하며, 아버지 미국이 교화해야 할 ‘아들’ 취급을 했다. 미국의 끈길긴 개입은 ‘가족의 일부’라는 정서와 관념을 놓치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반면, 쿠바인들은 미국을 전혀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미국은 제국주의일 뿐이었다. 1959년 1월1일 쿠바 혁명 직후의 피델 카스트로, 흐루쇼프, 케네디 등 주요인물의 행동과, 피그스만 침공 등을 통해 이들이 상황을 서로 악화시킨 과정을 살핀다. 주영국 미국대사를 지낸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938년 ‘뮌헨 회담’에서 대화로 평화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봤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를 지지해 천진난만한 대화파로 낙인 찍힌 사실, 이른바 ‘뮌헨 트라우마’가 케네디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준 점도 짚는다. 아돌프 히틀러는 체임벌린을 비웃듯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었다.
“엉클 샘의 바지에 고슴도치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흐루쇼프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해 소련의 목줄을 겨냥했듯,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해 미국의 목줄을 겨냥했다. 책은 1962년 10월16일부터 10월28일까지 13일간 진행된 위기와 백악관의 대응을 ‘케네디 테이프’(케네디가 남긴 비밀 녹음테이프)의 내용을 위주로 살펴간다. 안 교수는 “극적인 위기에서 압박작전(해상봉쇄 등)의 대성공은 후일 소련이 먼저 굴복했다는 신화를 창조하면서 미국 리버럴 진영이 강압전략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해상봉쇄는 전가의 보도처럼 북핵 문제에도 자주 거론된다.
터키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하면서 위기는 ‘해결’됐지만, 쿠바-미국 관계는 풀리지 않았다. “미국은 쿠바와 관련해서 항상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내고 있소…항상 핑계를 들이댔소. 가장 최근에 민주화 핑계를 대고 있소.”(피델 카스트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쿠바도 다른 나라에 혁명을 수출하는 등 미국의 눈밖에 났다. 그러나 쿠바와 미국은 계속 국교정상화를 모색했고, 2015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국교정상화를 선언했다. ‘오바마 뒤집기’에 나선 트럼프는 국교정상화를 무효화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지난 9월 백두산 천지에서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안 교수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단계별로 살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21가지 교훈을 끌어낸다. “약소국 쿠바와 북한은 자기식 강압적 외교 노선인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 왔다. 이들이 베두인 전설의 마초게임에서 벗어나 단호하지만 선제적으로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을 때 역사는 조금이나마 진전했다. 실제로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가 그랬고 북한의 김정은이 그러하다.” 위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비관은 너무 이르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