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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의 위기로 촉발됐다”

등록 2019-01-04 06:00수정 2019-01-04 19:44

동방의 부름-십자군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종인 옮김/책과함께·2만2000원

서양 중세를 관통한 십자군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진 최장, 최악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와 소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의 충돌은 11세기 말부터 1492년 서구의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 재정복)까지 400년이나 이어졌다. 그 기원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소집한 클레르몽 종교회의라는 게 통설이다. 교황이 “이교도의 야만적 침탈로부터 성도 예루살렘을 구하자”는 선동적 연설을 했고, 종교적 열정과 구원의 갈망에 도취한 서유럽 기사단과 평신도들이 적극 화답했다는 것.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1099), 프랑스 화가 에밀 시뇰의 1847년작 유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1099), 프랑스 화가 에밀 시뇰의 1847년작 유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국 옥스퍼드대의 비잔티움 역사학자인 피터 프랭코판은 <동방의 부름>에서 서유럽 기독교 중심의 시각을 뒤집고 “제1차 십자군 전쟁(1095~1099)의 맥락은 클레르몽이나 바티칸이 아니라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르바누스가 무장 봉기를 호소하게 된 건 동방의 비잔티움(동로마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직접 교황에게 지원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알렉시오스는 11세기 비잔티움 제국이 투르크와 북방 노르만족의 잦은 침탈에 시달릴 때 왕위 찬탈로 권력을 잡은 뒤, 내우외란을 타개할 묘안으로 서방 가톨릭 교회에 손을 내밀었다. 이는 서방과 동방으로 갈라진 교회의 통합으로 위상을 강화하려는 교황의 계산과 맞아떨어졌다.

지은이는 “십자군 역사가 왜곡된”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교황과 기독교 기사단의 관점에서 십자군을 설명하는 게 서방 역사가들의 입맛에 맞았”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라틴쪽 사료들에 견줘 “복잡하고 입체적인 동방의 사료들은 거의 무시됐을 만큼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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