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현명하고 우아한 인생 후반을 위한 8번의 지적 대화마사 누스바움·솔 레브모어 지음, 안진이 옮김/어크로스·1만7000원
해가 바뀌면서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나이 먹음에 싱숭생숭해지는 고갯마루가 있다. 아마 그때가 ‘나이 든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닐까. 나이듦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좀 더 쭈글쭈글해진 피부, 누군가에게는 좀 더 평온해진 얼굴일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건망증, 누군가에게는 지혜로움일지도 모른다. 나이듦이란 무엇일까.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은 마사 누스바움(71)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와 솔 레브모어(65) 전 시카고대학 로스쿨 학장이 나이듦에 따라 겪게 되는 일들을 현명하게 맞이하는 삶의 태도를 다룬 책이다. 책은 두 사람이 나이듦과 우정, 변화하는 몸, 과거를 회상하기, 사랑, 은퇴와 상속, 빈곤, 나눔 등을 주제로 한 편씩 쓴 에세이를 짝지어 놓았다. 철학자인 누스바움과 법·경제 전문가인 레브모어가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르고, 일부 주제에서는 반대되는 생각을 내놓기도 한다. 지은이들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키케로(BC 106년~BC 43년)의 책을 본보기로 삼아 집필했다고 밝힌다. 나이듦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도 키케로가 쓴 <나이듦에 관하여>(또는 <노년에 관하여>)와 <우정에 관하여>에서 시작한다.
마사 누스바움(왼쪽)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와 솔 레브모어 전 시카고대 로스쿨 학장이 대담하고 있다. 어크로스 제공
누스바움은 “서양문화사를 통틀어 노년에 관한 가장 훌륭한 철학서”로 <나이듦에 관하여>를 꼽는다. 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의 <노년>에 대해 “내가 접해온, 유명한데 엉터리인 철학서적들 가운데서 가장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2천여년 전에 쓰인 책이 더 낫다는 얘기다.
누스바움은 “나이 드는 사람에게 우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하다. 우정이 있어야 도전이 있고, 위안이 있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우정이 없으면 하루하루가 쓸쓸하고 빈약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키케로를 추어 올린다. 그러면서도 키케로의 책들이 우정과 나이듦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짚으며, 가상대화를 한다. 키케로가 바람직한 우정을 ‘신념과 취향이 유사하며 의견의 일치가 있는 관계’라고 본 것을 키케로가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반박한다. 키케로의 두 책은 아티쿠스에게 헌정됐다. 누스바움은 키케로와 아티쿠스가 정치철학과 성격 등에서 큰 차이가 있고, 그것이 편지에서의 유머와 놀림, 농담, 자기비하 표현 등을 통해 드러난다고 한다. 누스바움은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으로 차이를 극복했다”며, 친구 사이에 자유롭게 얘기하려면 오히려 어느 정도 ‘차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노년기를 진짜 연회처럼 만들려면 일상적인 우정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우정의 경험이란 뒷담화, 추측을 통한 이해, 내밀한 농담,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기술 등을 가리키고요.”
마사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어크로스 제공
레브모어도 친구는 인생이라는 모험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동반자 구실을 한다며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페이스북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각자 끌어모은 친구들의 숫자로 자기를 표현한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사귀라고 했던 ‘친구’의 개념에 가깝긴 하지만, 그들은 진짜 친구가 아니고 키케로 같은 철학자가 이야기했던 친구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 뇌의 네트워킹 능력으로는 최대 150~200명의 친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우정에서 ‘선의’보다 ‘신뢰’를 강조한다. 조언도 친구 사이에 신뢰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나이듦에 따른 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얘기하며 한국의 성형수술을 ‘나쁜 예’로 든다. 한국인들이 서양인처럼 보이기 위해 열성적으로 성형수술을 한다고 본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친구와 애인들이 우리의 껍데기만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기를 바라게 된다. 외모가 누군가에게 나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외모가 나의 본질은 아니다.” 모든 성형수술을 거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나이를 거스르려는 집착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지나친 존중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솔 레브모어 전 시카고대 로스쿨 학장. 어크로스 제공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가 두꺼워진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과거를 생각하고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과거를 향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은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을 통해 과거에 집착했을 때의 비극을 얘기한다. 그래도 과거는 소중하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과거에 종속시키는 것이 실수라면, 현재와 미래를 선호한다는 이유로 과거를 폐기처분하는 행동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똑같은 실수다.“
사랑은 세월을 관통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보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화에는 “몸의 감각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빠져 있다. 그들의 대화는 신체를 이상화한 풍경에 대한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다. “10대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실제 사람과의 육체적인 사랑에 미숙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다르다. “자신들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서 너무나 많은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인간 생활을 초월할 의사가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은 젊은이들의 사랑이 가질 수 없는 깊이를 가진다. 더 나아가 레브모어는 나이 들수록 좀 더 모험적인 연애를 하라고 촉구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결합을 훨씬 많이 목격하게 되리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은이들은 노인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될 세상에 우리는 무엇으로 기여할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노년기에는 그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고통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년을 기회의 시기로 생각하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노년의 수수께끼를 깊이 성찰하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이 나이듦을 생각하고 토론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