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세계사피타 켈레크나 지음, 임웅 옮김/글항아리·3만8000원
원생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600만~700만년 전께 등장했다. 말(馬)과 동물은 6000만년 전께 나타나 진화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000년께부터 인류는 말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두 발 동물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네 발 동물의 협력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치타처럼 말보다 빠른 동물도 있지만 장거리를 말처럼 빨리 달리는 동물은 없다. <말의 세계사>는 힘과 속도로 문명을 이끌어온 말의 이야기다. 인류학자인 피타 켈레크나는 고고학과 인류학, 역사학, 언어학 등의 성과를 토대로 말을 다루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말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방대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말이 끼친 영향은 ‘말이 있는 문명’과 ‘말이 없는 문명’을 비교하면 선명하게 드러날 터다. 말은 북아메리카에서부터 퍼져나갔는데, 공교롭게도 아메리카 대륙에선 9000년 전께 멸종했다. 인류의 남획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말은 인류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말과 함께 문명을 이룬 구대륙에서 얘기가 시작된다. “말이 인간 문명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려면 무엇보다 물이 풍부했던 원시 문명의 중심부가 아니라 초원지대와 사막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농경 중심이 아닌 유목 중심의 역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변방의 기마병’들은 동쪽, 서쪽, 남쪽으로 진출하며 정착 생활을 하던 ‘충적토 문명’을 약탈하고 제국을 세웠다. 지은이는 이를 ‘기마 군국주의’라는 말로 설명한다. 기마병들의 광범한 이동경로 덕분에 물품이 빨리 운송될 수 있었고,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온갖 재배종의 수용, 신기술의 도입, 외국 발명품의 전래, 사상의 유포, 종교의 전파, 과학과 예술의 확산이 그 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군대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군대의 전투를 그린 ‘알렉산더 모자이크’. 작자 미상,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책은 여섯 차례의 중요한 기마병의 이동, 즉 정복의 역사를 살핀다. 대부분 학자들은 기원전 4000년께 흑해-카스피해 연안 초원의 인도·유럽어족 농경민이 말 사육을 시작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어떻게 말이 식용 동물에서 수송 수단으로 바뀌어갔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말 사육은 동쪽, 서쪽, 남쪽으로 퍼져나갔고, 기원전 2000년께까지는 말이 끄는 전차가 널리 퍼졌다. “전차는 신성한 탈것”이었다. 말은 금, 태양, 영웅적 전사와 결합돼 “우주적 동물”이 되었고, 전차와 바퀴는 “태양원을 상징해 신들에게 이동수단을 제공했다.” 유목민은 조상을 모시는 거대한 쿠르간(봉분)을 세웠는데 말을 함께 매장했다. 말은 “영혼을 태양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었다. 기마병들은 ‘태양의 후예’들이었다.
기원전 2000년~기원전 1년 기마병은 초원지대를 벗어나 정착 문명 중심지들을 침략해 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2000년께는 중국에 사육한 말이 도래했다. 전차병 외에 기병도 등장했다. “페르시아 기병이 리비아에서 크림반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에게해에서 인더스강까지 정복했던 사이, 기마인의 바지 역시 전 세계를 누볐다. 수천년 동안 치마는 고대 세계 전역에서 남자들의 정식 복장이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가 그린 ‘이수스 강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전투’(1529년)는 거대한 규모의 기마병 전투를 그린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세번째 시기는 지중해의 기마 군국주의 시대다. 한니발이 이끄는 기병대에게 로마의 보병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거듭 패배했다. 로마도 기병 전술을 채택해 지중해 연안과 유럽 대부분을 식민화했다. 로마 몰락기에 생겨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은 캅카스산맥의 사르마티아계 부족의 전설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아라비아말을 탄 무슬림 기마병이 네번째 이동의 주인공이다. 동쪽으로 페르시아, 서쪽으로 스페인, 남쪽으로 사하라 사막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아라비아말은 영리하기로 유명했으며, 말 중에 가장 빠르고 강인했다. 사료를 거의 먹지 않고도 건강을 유지했고 빠른 속도를 내고 엄청난 체력을 과시했다.” 이집트·인도·그리스 등에 기반한 아라비아 학문은 이런 말을 타고 빠르게 퍼져갔다.
동쪽 태평양에서 서쪽 발트해까지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군은 기병으로만 구성됐다. “유럽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일한국은 불교도건 기독교도건 이슬람교도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융합의 장소였다.” 인쇄술과 화약 등 중국의 발명품들이 서유럽으로 흘러갔다.
마지막 이동은 대서양-유럽인 기마병의 신대륙 침략이다. 콜럼버스는 1493년 두번째 아메리카 항해 때 군마 50마리를 싣고 갔다. 원주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다. “(말은) 기독교도 기마병들이 소수의 인원으로도 25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신세계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게 해줬다.” 고향으로 돌아온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재앙이었다.
“두 반구의 주목할 만한 격차를 만들어낸 것은 구세계 유럽에는 말이 있었고, 신세계 아메리카에는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메리카 중부 대평원은 농업을 위해 개발되지 못했고, 상품들은 인간 짐꾼들이 운반했다. 마야인은 ‘영’(0·zero)을 인도인보다 500년 앞서 발명했지만 널리 퍼뜨리지 못했다. 말이 인도인의 발명품 ‘영’을 빠르게 전파했다.
지은이는 종교에서 말의 영향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역 수준에 머무는데, 세계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여러 나라에 걸쳐 있고 수억~수십억명의 신자를 갖고 있다. “이들 종교는 기마술과 완전하게 연결된다.(…) 4대 종교는 기마 제국들이 형성되던 기원전 2000년과 기원후 1000년 사이에 나타났다. 4개 종교 모두 말 조각상들로 가득하다.” 이들 종교는 모두 말을 타고 퍼져나갔다.
언어 분포도 말의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모국어로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쓰는데 대부분 유라시아에 살고 있다. “이런 분포는 15세기 이후 유럽 팽창에 따른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천년 전 기마인 팽창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한다.
말은 문명을 발전시켰고, 또 철저한 파괴를 부른 양면성을 지녔다. 말의 힘과 속도는 인류에게 끔찍한 고통도 안겨줬다.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말에 걸터앉은 인간은 정말로 스스로 상상한 피조물, 즉 지적으로 뛰어나기는 하지만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도 있는 반은 신이고 반은 야수인 켄타우로스가 되었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흔들리지 않는 강박은 지금도 계속된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 남긴 유산이 지구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은이는 경고한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