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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친애하는, 여성 삼대 이야기

등록 2019-03-15 06:01수정 2019-03-15 20:07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지음/현대문학·1만1200원

백수린(사진)의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여성 삼대의 이야기다. 소설은 그중 가장 젊은 인아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인아는 엄마인 현옥과 버성긴 편이고 현옥은 다시 그 엄마와 서먹하지만 조손 사이는 매우 친밀하고 애틋하다. 현옥은 갓 낳은 외동딸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를 받아 올 정도로 강단이 있고 성취욕이 높은 사람이다. 인아는 자신이 그런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딸에게 실망할 때마다 엄마는 ‘너는 아빠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라는 말을 비수처럼 내뱉고, 딸은 ‘나는 이렇게 엄마를 실망시키는 사람으로 남을 거야’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고령인 할머니가 죽음을 맞기까지 몇 달 동안 인아가 할머니의 곁을 지키고, 지방대학 교수인 현옥이 주말을 이용해 규칙적으로 이들을 방문하면서 여성 삼대는 모처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겉돌며 연기를 하듯 관계를 이어가던 세 여자는 차츰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며 결국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이가 된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젊은 나이에 혼전 임신을 하며 내처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인아가 “엄마, 미안해요”라고 말하자 엄마는 뜻밖에도 이렇게 받는다. “아니야. (…) 결혼해 아이만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지.” 인아는 결국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 다시 대학 공부를 거쳐 무대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는데, 다시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모두가 만류할 때 “나에게 내가 겨우 서른셋이며 아직 젊고 예쁘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 엄마였다”.

그런데 정작 아이의 아버지인, 인아 남편 강의 반응은 어땠던가? “그럼 너는 우리 아이를 너처럼 외롭게 만들어도 좋다는 거야?” 이 말에서는 어쩐지 영특한 딸을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했던 현옥 아버지의 음성이 겹쳐 들린다. “우리 딸은 사내아이의 머리를 지녔어!” 젊은 인아가 대학 신입생 시절 과방에서 엿들었던 남자 선배들의 말은 한층 가관이다. “원래 못생긴 여자애들이 뭐든 열심히 하잖아.”

인아 할머니의 친구인 글로리아 할머니가 1960년 4월 시위에 참여했을 때 “시장통의 국밥집에서 일하며 아이 셋을 키우던 서른한 살의 엄마였다”는 사실, “음식 욕심이 그다지 없는 할머니가 요리를 즐겼던 것은 할머니에게 주어진 일상의 일들 중 그것이 가장 창의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관찰 등이 소설 속 남자들의 언어 폭력에 맞서는 형국이다.

소설 말미에서 할머니는 자신이 아직 30대였던 시절 다섯 살 딸 현옥과 함께 사람 없는 바닷가를 지나다가 문득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일을 인아에게 들려준다.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면 그런 엄마가 부끄러워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여자아이”의 영상은 할머니에서 엄마를 거쳐 딸에게로 이어지는 여성의 자유와 독립 의지를 인상적으로 그려 보인다.

글 최재봉 기자,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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