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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떻게 다르고 동등하게 살 것인가

등록 2019-03-22 06:00수정 2019-03-22 19:49

‘다원화’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찰
“개인에게 다원화는 감소된 정체성”
근본주의·포퓰리즘, 다원화에 저항
다양성 만나는 ‘중립 영역’ 제안도
나와 타자들-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민음사·1만6000원

2017년 5월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41)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회당을 뛰쳐나와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이라는 뜻)를 창당한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연초 여론조사에서는 공화당 후보와 극우 국민전선(FN) 후보에 밀리는 후보였는데도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 이졸데 카림(60)은 “마크롱이 거둔 믿을 수 없고 전례가 없는 승리와 프랑스 사회당의 재앙 같은 패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마크롱은 정치 영역에서 아마도 가장 본질적인 전환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본질적 전환은 ‘다원화된 사회의 정치 욕구’였다고 한다. 개인들은 “일반화하는 하나의 깃발” 아래 놓이는 것을 거부했다. 마크롱은 사람을 계급으로, 집단으로 호명하는 ‘옛날 방식’을 버리고, 개인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오늘날의 정치 욕구를 포착했다.

이졸데 카림의 저서 <나와 타자들>은 ‘다원화’를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다원화의 의미를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변화 차원에서 분석하고, 근본주의와 포퓰리즘·타자 혐오 등을 다원화에 대한 “방어” “저항”, 즉 ‘반동’으로 해석한다. 유럽의 사회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통찰을 제공한다.

다원화는 근본적인 변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될 때조차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 다원화라는 사건은 그저 벌어졌다. 어느 날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격체로 깨어났다.” 다원화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 이전의 ‘동질 사회’와 비교해 보자.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했다. 상상이었지만 잘 기능했다. “민족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대중을 결합하고 통일하는 유일한 정치 형태”였다. 한국인, 독일인 등 민족 유형은 ‘유사성’을 제공했다. “특정 민족 유형의 꼴을 갖추면 나는 그 속에 속하게 된다는 환상은 완전하고 온전한 정체성을 꿈꿨다.” 이 사회는 또 ‘당연하며 의심의 여지 없는’ 소속을 보장해 줬다.

키프로스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암마르 함마쇼가 2017년 9월 니코시아 교외의 코키노트리미시아 난민캠프에 도착한 자신의 아이들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 키프로스/로이터 연합뉴스
키프로스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암마르 함마쇼가 2017년 9월 니코시아 교외의 코키노트리미시아 난민캠프에 도착한 자신의 아이들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 키프로스/로이터 연합뉴스
동질 사회는 지난 20~30년 동안 천천히 사라졌다. 저자는 다원화를 ‘더하기’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한다. 기존의 것이나 더해진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부르기 때문이다. “다원화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바꾼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내밀하고 깊은 변화일 것이다.” 다원화 사회는 사람들이 더 이상 ‘온전하고 당연하게 이 사회에 소속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럼, 개인들로만 분산된 순수 개인주의 사회인가? 저자는 개인주의를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한다. 18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가 ‘1세대 개인주의’ 시대다. 신분 등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만들었다. 1인1표제가 그 예다. 이 개인주의는 정당 등 거대 조직들한테 개인을 변화시키는 일을 맡겼다. “개인은 자신을 변화시켜주고 당원이나 동지로 만들어 주는 정당에 가입했다.”

2세대는 1960년대에 시작됐다. 여기서는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개인이 주장하는 정체성이 핵심이 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이다. 여성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등이 영향을 끼쳤다. “개인은 지금 그대로의 자신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운다.” ‘차이’가 부각된다.

다원화된 사회의 개인주의가 3세대에 해당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언제나 다른 정체성과 나란히 서 있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다양성은 우리의 내면으로, 정체성에 진입했다. “다원화는 각자 안에 자리잡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고유한 정체성의 축소와 제한을 뜻한다. ‘감소된 주체’ ‘작아진 자아’가 이 개인주의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체성을 만들고 지키는 일이 매우 수고스럽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이를 자유, 해방으로 느낀다. 누군가는 상실, 위협으로 느낀다.”

다원화된 주체들은 종교와 문화, 정치의 무대에 등장했다. 다원화에 저항하는 방어 형태들도 함께 나왔다. 오늘날 한 종교도 다른 종교들, 무종교와 나란히 서 있다. 신앙을 위해 “결정”, 즉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다원화 사회 신앙인의 전형으로 ‘개종자’가 꼽히는데, 스스로 신앙을 결정한 사람이다. 결정을 통해 ‘근본주의’로 갈 수도 있다. “방어는 언제나 과거와 연결된다. 다원화에 반대하는 저항은 어떤 미래 전망도 낳지 못한다.”

다원화 사회의 문화에서 전형적 인물은 ‘트랜스젠더’다. 저자는 콘치타 부르스트(30)를 예로 드는데, 그는 여장 남자가수로 여자 옷차림에 수염을 기른 채 노래한다.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불안정한 정체성의 상징이 된다. ‘전통의상’과 ‘고향’ 등 옛것을 소환하며 “종교·민족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3세대 개인주의의 개인은 집단이나 계급, 정당에 의해 대변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개별성을 지닌 채 정치에 참여한다. 이를 ‘완전 참여’라고 한다. 참여한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마크롱은 이런 변화를 이해했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며 정치가 약속하는 미래의 행복을 거부하는 “정치적 쾌락주의”가 특징이다. 행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시민들이 지난해 7월 로마 내무부 청사 앞에서 손에 빨간색 물감을 칠한 채 마테오 살비니 내무장관의 강경한 반이민, 반난민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이탈리아 시민들이 지난해 7월 로마 내무부 청사 앞에서 손에 빨간색 물감을 칠한 채 마테오 살비니 내무장관의 강경한 반이민, 반난민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다원화에 대한 저항은 포퓰리즘에서 도드라진다. 우익 포퓰리즘은 “결코 다원적이지 않은 민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전략이다. 또 친구와 적이라는 상황을 생산하는 전략”이다. 위로는 엘리트, 아래로는 이민자와 난민 등이 ‘적’이다. 대응책으로 ‘계몽’이 거론되지만 “이론적으로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감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포퓰리즘적 국면을 이성적 계몽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적 오류로 이끈다”고 본다. 포퓰리즘은 정체성 문제에 집중하고, 정체성은 강렬한 감정을 일으킨다. 포퓰리즘은 부정적 감정과 관계 맺으며 공포와 거부감을 강화시킨다. “이성은 방황하는 감정의 잠재력을 포착할 수 없다.” 그러면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한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포퓰리즘은 누군가를 적으로 삼아야 기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다원화된 개인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중립적 공공영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스트리아 등에 있는 ‘만남 구역’을 비유로 삼는데, 도로교통법의 통제를 벗어나 구성원들 스스로 주의해서 움직이는 공간이다. 그의 제안은 모호하다.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 미래는 그 대답을 찾는 데 달려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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