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지음/글항아리·1만5000원 “나와 최근까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와 동료들이 공인 자격이 아니라 엄격하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1945년 11월19일 임정 주석 김구는 웨더마이어 주중 미군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 항공편을 제공받기 위해 점령군인 미군정의 요구에 따라 작성된 이 편지는,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의 입장을 방증한다. 미국은 임정을 단 한 번도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 잇따라 출간되는 요즘,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펴낸 <임정, 거절당한 정부>는 국제 역학 속 임정이 자리한 위치를 차분하게 들여다 본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을 중심으로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임정 승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임정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은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방략의 하나였다. 피난살이를 면치 못했던 장정시기(1932~1940년)를 제외하고 상하이와 충칭 시절 임정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했다. 강대국의 승인을 통해 대표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재정 및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을 계기로 출범한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임정은 서글프게도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미국은 애초 임정을 승인할 마음이 없었다. 1942년 이래 3단계에 걸쳐 마련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초기부터 피지배 민족의 자치가 아닌, 신탁통치를 염두에 뒀다. 이 교수는 신탁통치안은 미국에게 식민 모국과 이해관계를 조정해 낼 수 있고, 식민지 내부의 민족운동을 순치시켜 미국 경제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이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미국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즉시 해방될 경우 산업시설의 국유화 위험이 적지 않은데다, 아래로부터의 경제적 요구가 분출되면서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봤다. 신탁통치 아래서 외국 자본과 무역의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체제를 도모한 이유다. 드골이 이끌었던 망명정부인 ‘자유프랑스’에 대해서도 미국은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차이는 결국 힘이었다. 프랑스는 보유한 옛식민지 군대의 무력과 국내 레지스탕스의 좌우 단결 등을 바탕으로 미국의 견제에도 해방군이 돼 파리에 먼저 입성했다. 미군정 하에서 국제법적 승인을 얻지 못한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는 그 순간, 이미 신탁통치와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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