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핑 지음, 이준식 옮김/글항아리·1만6000원 1506년 겨울,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북경 자금성 남문 밖으로 한 관리가 끌려왔다. 환관 부패를 비판한 상소 때문이었다. 명나라 군인들이 그 사내의 관복을 벗겼다. 바닥에 엎드린 그에게 곤장이 내리 꽂히던 순간, 한 환관이 소리쳤다. “그자의 바지도 벗겨라.” 체면과 체통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주자학의 시대. 남 앞에서 그것도 엉덩이를 내 놓고 곤장을 맞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서른 남짓의 관리는 40대의 곤장을 맞고서도 죽지 않았다. 유배지로 가는 길, 환관이 보낸 군인들이 목숨을 노렸지만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생의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그는 훗날 공자와 맹자에 이은 중국 최대의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호를 딴 양명학은 당대뿐 아니라 량치차오(梁啓超),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 등 근현대 중국 정치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행합일설로 유명한 양명학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면서 그의 이름을 동아시아 전반에 각인시켰다. 저장대 철학과 교수인 둥핑의 <칼과 책>은 군사전략가이자 지방관리, 문인이었던 왕양명의 생애를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엮은 평전이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의 강연을 수정·보완한 책으로 문무겸전한 왕양명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열다섯 나이에 집을 뛰쳐나가 변방의 국방태세를 점검했다는 일화나, 한 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혼례도 참석하지 않았던 일, 험난한 관료생활 속에서도 조정 대신의 탐욕과 전횡에 줄곧 맞선 인생역정 등 ‘특출 나면서도 특이한’ 인간 왕양명의 삶이 생생하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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