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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른다’는 위험한 생각

등록 2019-06-21 06:02수정 2019-06-21 19:56

범죄 수사·재판·처벌 과정 따라가며
미국 형사사법제도 문제 생생히 짚어
“인간 행동에 대한 부정확한 가정 아래
사법체계 만들어져 불공정할 수밖에”
언페어-사법체계의 숨겨진 불평등을 범죄심리학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다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세종서적·2만원

1979년 8월11일 아침, 미국 조지아주 맨체스터의 한 집에 남성이 침입해 74살 여성을 때리고 성폭행한 뒤 지갑을 뒤져 70달러를 빼냈다. 그는 전화 연결선을 뽑아버린 다음 뒷문으로 걸어나갔다. 범죄 현장에 도착한 수사관들은 소파의 시트에서 털 등을 수집했다. 20살 흑인 청년 존 제롬 화이트가 범죄 발생 6주 뒤인 9월21일 체포됐다. 수사당국이 제시한 용의자들의 사진을 보고 피해 여성이 화이트를 지목한 지 1주일 만이었다. 화이트는 범행을 부인했다. 윌리엄 브레넌(1906~1997) 연방대법관은 “증인석에 앉아 피고인을 가리키며 ‘바로 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살아 있는 인간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화이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8년 뒤인 2007년 이뤄진 디엔에이(DNA) 검사는 화이트가 범인이 아니고, 제임스 에드워드 퍼햄(당시 54살)이 범인임을 가리켰다. 더 놀라운 사실은 1979년 수사당국이 피해 여성한테 용의자 5명이 늘어선 사진을 보여줬을 때, 퍼햄도 그 사진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진범을 눈앞에 놓고서도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골랐던 것이다. 용의선상에 없던 퍼햄은 우연히 다른 사건으로 붙잡혔다가, 경찰이 사진을 찍을 때 ‘자리 채우기’용으로 불려 나와 사진에 찍혔다.

1979년 8월11일 미국 조지아주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용의자들의 사진. 피해 여성은 가운데 있는 존 제롬 화이트가 범인이라고 지목했으나 28년 뒤인 2007년 이뤄진 디엔에이(DNA) 검사 결과 가장 오른쪽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제임스 에드워드 퍼햄이 진짜 범인으로 밝혀졌다. 용의선상에도 없던 퍼햄은 우연히 다른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가 성폭행 사건 관련 용의자 사진을 찍을 때 ‘자리 채우기’용으로 불려 나와 사진에 찍혔다. 세종서적 제공
1979년 8월11일 미국 조지아주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용의자들의 사진. 피해 여성은 가운데 있는 존 제롬 화이트가 범인이라고 지목했으나 28년 뒤인 2007년 이뤄진 디엔에이(DNA) 검사 결과 가장 오른쪽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제임스 에드워드 퍼햄이 진짜 범인으로 밝혀졌다. 용의선상에도 없던 퍼햄은 우연히 다른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가 성폭행 사건 관련 용의자 사진을 찍을 때 ‘자리 채우기’용으로 불려 나와 사진에 찍혔다. 세종서적 제공
애덤 벤포라도 미국 드렉셀대학 법과대 교수는 <언페어>를 쓰기 위한 조사를 하며 알게된 가장 믿기 어려웠던 사례로 이 사건을 꼽는다. 미국 형사사법제도의 문제를 파헤쳐온 저자는 이 책에서 피해자·피의자(피고인)·목격자·경찰·검사·배심원·판사가 불확실한 기억과 편견, 직감 등에 영향을 받아 저지르는 잘못을 여러 사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연구와 실험 결과 들을 근거로 현행 사법제도가 인간 행동에 대한 부정확한 가정과 이해 아래서 만들어져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개혁방안을 제시한다.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지은이는 피해자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 등이 피해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사건 전개는 크게 달라진다.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자동 처리 과정(시스템 1)은 재빨리 현장을 파악하고 놓쳤을지 모르는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바로 앞에 있는 것들에 근거해 피해자에 대한 결론에 이른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심리 과정(시스템 2)이 첫인상들을 무시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뉴욕타임스> 기자를 하다 퇴직한 남성은 강도를 당했는데, 알코올 중독자로 여겨져 결국 숨졌다.

결백한 사람은 자백하지 않고, 고문도 사라져 ‘허위 자백’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허위 자백과 불리한 진술은 살인에 대한 잘못된 유죄 판결을 낳은 주된 원인이다. 미국에서 살인 유죄 판결 후 디엔에이 검사에 의한 무죄 석방 사건의 60% 이상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경찰의 신문 기법, 피의자가 받는 스트레스와 피로, 두려움이 거짓 자백을 부를 수 있다. 특히 미국의 ‘사전 형량 조정제도’(플리바게닝·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범죄를 증언하는 대가로 검찰이 형을 낮춰주는 거래)가 거짓 자백을 부추긴다고 짚는다.

인간 행동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피의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범죄자가 탐욕, 욕정, 증오로 가득한 목적을 좇기로 결심한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행위자라고 상상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여러 힘들, 그리고 우리가 거의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역학 관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뇌 이상이 범행의 원인일 수 있다. “병적인 거짓말쟁이, 매우 공격적인 사람,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은 전두엽 피질 부위의 회백질 양이 적은 경향이 있다.” 이런 생물학적 설명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범죄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정당화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처벌하려는 욕망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피의자한테 유리한 증거를 변호인에게 건네지 않아 사형선고를 받게 한 ‘나쁜’ 검사도 있다. “검사들이 규칙을 어긴 상황에 대해 추궁받았을 경우 얼마나 많은 검사가 똑같은 변명을 내놓는지를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음, 그 사람이 이 범죄에서는 유죄가 아니었다고 해도 무언가에는 유죄였습니다.’” 한국 검사들도 다를 바 없다.

대개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한 모습이지만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대개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한 모습이지만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배심원들은 유·무죄 평결 때 피고인의 인종과 외모 등의 영향을 받는다. 판사는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까? 이스라엘의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일하는 8명의 판사를 관찰한 결과가 흥미롭다. 판사들은 가석방 신청 가운데 64.2%를 기각했다. 그런데 시간대별로 판단이 달랐다. 하루 업무 시작 또는 한 차례의 식사 휴식 이후에는 가석방 허가가 65% 정도에 이르렀다. 대조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거나 식사 휴식 시간 직전에는 허가 결정이 0%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의의 여신(디케)상.
정의의 여신(디케)상.
저자는 사법제도 개혁에서 심각한 도전 중 하나로 불평등을 꼽는다. “부자이고 연줄이 많은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고, 가난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은 감옥에 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미국에서는 ‘재판 컨설턴트’가 의뢰인에게 배심원 평가를 제공하고, 증언 준비 등을 맡는데, 돈 많은 화이트칼라 피고인을 위한 ‘표준 변호 패키지’의 일부이다.

지은이는 “인간은 스스로가 거의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요인들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지각, 기억, 판단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며 여러 방안을 내놓는다. ‘현실 재판’을 없애고 ‘가상 재판’(virtual trial)으로 가자는 급진적 제안도 하는데, 아바타를 통한 가상 재판이 편견 제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정의의 여신’은 대개 한 손엔 저울, 다른 손엔 칼을 들고,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눈가리개는 당사자들한테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상징이다. 한국의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엔 저울, 다른 손엔 법전을 들고 있는데, 눈가리개를 하지 않았다. 우리 사법 현실 탓에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을 잘 살펴서 봐주기 위해’ 눈을 가리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정의의 여신이 자신의 거처에 기거하며 재판을 거래하고 신성을 모독한 판사들에게도 눈을 감아줄지 궁금하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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