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에 속삭이는임철우 지음/현대문학·1만1200원
임철우(
사진)는 ‘5월 광주’를 비롯한 현대사의 아픔을 기록하고 해원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아 왔다. 학살과 항쟁의 열흘을 꼼꼼하게 되살린 다섯권짜리 5·18 소설 <봄날>을 비롯해,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 70·80년대 민주화투쟁 등을 다룬 소설들에서 그는 사제나 무당처럼 죽은 이들을 천도하고 산 자들을 위무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5·18 당시 부끄럽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이 그의 사제적 글쓰기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다.
임철우.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대학 교수 일을 그만두고 두어해 전 제주로 내려간 그가 소설집 <연대기, 괴물>(2017) 이후 2년여 만에 내놓은 신작 경장편 <돌담에 속삭이는>에서 제주 4·3의 아픔에 눈을 돌린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 자신의 가탁이라 할 ‘한’은 4·3 당시 희생당한 어린 남매들의 환영을 보곤 하는데, 그중 한 아이인 ‘몽희’는 한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당신은 그 특별한 눈을 이미 지녔는지도 몰라. 당신은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 그 눈이 열리는 순간부터 당신에겐 너무나 힘든 시간이 시작될 테니까.”
몽희가 말하는 눈이란 죽은 아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눈을 말한다. 60년 전(소설 속 현재 시점은 2008년으로 되어 있다) 4·3 당시 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죽은 아이들은 그때 헤어진 엄마를 기다리며 여전히 자신들이 죽은 집터 주변을 떠돌고, 엄마의 혼령 역시 아이들을 찾아 동네를 배회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 죽은 혼들이 한의 눈에는 뜨인다.
한이 이런 특별한 눈을 지니게 된 까닭은 그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한은 6·25 전쟁이 나던 해에 잉태돼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 것. 소설 앞부분에서 한은 물 위를 떠다니는 수백 수천 시체들의 행렬을 꿈에서 만난다.
“수십 명씩 굴비 두름처럼 한 줄로 나란히 엮여 있다. 다들 똑같이 등 뒤에서 손목이며 팔뚝을 밧줄 혹은 철사 줄로 결박당한 모습. (…) 목덜미와 가슴께까지 온통 피투성이인 까까머리 소년. 두 눈을 허옇게 부릅뜬 채 굳어버린 노인. 양팔로 가슴을 그러안고 새우처럼 웅크린 젊은 여자. 아직도 입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는 청년….”
이런 전쟁 희생자들 이미지와 4·3 희생자 남매 이야기가 한을 매개로 해서 만나는 셈인데, 그렇다는 것은 4·3과 6·25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연원과 맥락을 지닌 동일한 상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상처의 계보는 베트남전쟁과 광주 5·18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임철우의 생각이다. 그의 연작 소설 <백년여관>(2004)이 그런 인식을 담은 작품이었다.
<돌담에 속삭이는>에서 돌담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남매의 혼령은 결국 엄마와 재회하고, 제주 설화에서 죽은 아이들이 간다는 서천꽃밭으로 간다. 마침내 해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소설 주인공 한―그리고 소설가 임철우 자신―의 ‘아파하는 마음’이 아이들을 설화 속 꽃밭으로 이끌었다 할 수 있겠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