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쓴 ‘젊은 날의 다산 정약용’ 평전 2권
“박제화하거나 가톨릭 신자 만들 생각 아냐…그도 고뇌하는 한 청춘이었다”
“박제화하거나 가톨릭 신자 만들 생각 아냐…그도 고뇌하는 한 청춘이었다”
정민 지음/천년의상상·각 권 1만7500원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한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쓴 다산 정약용(1762~1836) 평전이 나왔다. <다산선생지식경영법>(2006) <다산의 재발견>(2011) <다산 증언첩>(2017) <다산의 제자 교육법>(2017)을 쓰면서 10년 넘게 다산의 자료와 사투를 벌여온 정 교수가 이번엔 40살 이전까지 ‘젊은 다산’을 파고든다.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은 다산의 글, 로마교황청 문서, 조선 천주교 관련 연구 기록과 논문들을 치밀하게 겹쳐 읽으며 다산이 글로 남기지 않은 진실을 추적한다. 정치적 야심가, 지적 포식자, “직진형 투사”로서 다산의 청춘은 알려지지 않은 만큼 생경하기까지 하다. 특히 천주교와 다산의 관계를 밝힌 대목은 논란을 예고한다. 다산은 첫 한국인 영세자 이승훈(1756~1801)이 임명한 10인의 신부 중 한 명이었고,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야고보(1752~1801)를 구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다산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지적 호기심이었을 뿐이며 배교 뒤 유학자로 돌아왔다는 국학계의 주장과 자의 반 타의 반 신앙의 휴지기가 있었을지언정 죽을 때까지 신심을 갖고 있었다는 가톨릭계의 주장이 홍해처럼 쩍 갈라진 현실에서 정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간다.
한국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곤 했다. 그림은 김태 화가의 <명례방 집회>. 1984년. 천년의상상 제공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 본문.
1988년 다산의 것이라고 주장되었던 인장. 측면에는 성모마리아상까지 새겨놓았으나 가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민 교수는 1980년대 천진암 성지가 개발되던 때 이곳에 팔아먹으려고 만든 가짜라고 추정했다. 천년의상상 제공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 표지. 그는 이 책에서 다산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한 이벽의 상황과 심리상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경과를 묘사했다. 천년의상상 제공
로마교황청에 보관된 첫 영세자 이승훈의 편지 프랑스어 번역 사본. 1801년 2월18일 이승훈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을 적에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북경의 서양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폭탄선언’을 했다고 한다. 천년의상상 제공
금정역이 있던 충남 청양군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 곳이다. 천년의상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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