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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적대의 정체

등록 2019-09-27 06:01수정 2019-09-27 20:32

여성주의 시각으로 읽고 꼼꼼히 분석한 14편의 여성 서사 웹툰 비평서
탈가정, 탈코르셋, 탈혼, 탈조선…독자 고민 공명하며 공동체적 경험으로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탱알 지음/산디·1만7000원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는 국내 웹툰 플랫폼에 연재했거나 연재 중인 여성 작가의 작품 14편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읽고 분석한 비평서다. <단지>, <내 ID는 강남미인!>, <혼자를 기르는 법>, <데일리 프랑스>, <아기낳는만화>,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마스크걸> 등 완성되어 나온 만화들에 “페미니즘을 열심히 ‘끼얹어’가며 여성주의적 텍스트 읽기”를 한 셈이다.

2015년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불편한 용기’ 시위, 미투 운동의 확산 등 여성들의 목소리에 여성 만화가들은 발빠르게 응답했다. 전례없이 날카롭고 기민한 페미니스트 비평 독자군의 탄생 또한 그런 배경을 가졌다. 지은이는 1990년대에 잠시 빛나다가 지금은 잊힌, 여성 서사 만화들의 뒤를 밟지 않도록 여성 독자들이 콘텐츠의 생성을 목격하고, 기록하고, 이에 힘입은 창작자가 작업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뜻을 책에 담았다.

탈가정, 탈코르셋, 탈혼, 탈조선, 퀴어…. 낡은 시선에서는 이 책의 일상 의제가 몹시 파괴적이고 불쾌할지 모른다. 분석 대상으로 삼는 웹툰의 내용도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다. 10대 여성이 겪는 가정폭력, 한국을 기어이 벗어나려는 여성의 욕망, 데이트 폭력,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온통 뒤섞인 살인사건 등. 상상인지 과장인지 은유인지 실제인지 모호한 이 웹툰의 에피소드들은 사실 모두가 1980년대 전후 태어난 한국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연 작가의 <화장 지워주는 남자>. 메이크업 서바이벌 쇼를 소재로 탈코르셋 운동을 둘러싼 논쟁거리를 포함해 여성의 외모와 꾸밈 문제를 지적한다. 이연 작가 제공
이연 작가의 <화장 지워주는 남자>. 메이크업 서바이벌 쇼를 소재로 탈코르셋 운동을 둘러싼 논쟁거리를 포함해 여성의 외모와 꾸밈 문제를 지적한다. 이연 작가 제공
책은 ‘탈가정’을 한 여성의 10대 시절을 다룬 웹툰부터 대학 시절, 유학,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를 다룬 현실까지 여성의 생애주기를 따라가며 작품을 분석한다. 어머니에 의한 가정폭력 이야기를 담은 <단지>의 경우를 보자. “한국의 아들들은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그 비밀”은 “순진함으로 무장한 가해자-엄마”이기에 딸들은 늘 혼란스러웠다. “여자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적은 자원을 배분받아야 했던 딸들이 스스로를 치료하느라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는 부조리”를 겪는 주인공과 작가, 여성 독자들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일기장에 바탕을 둔 작가 개인의 프로젝트가 “독자들 저마다의 역사와 공명하며 공동체적 경험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메이크오버 쇼’를 다룬 <화장 지우는 남자>는 어쩌다 코스메틱 산업의 최전방에 내세워진 대학생과 ‘금손’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경연물 이야기 구조다. 필사적인 경연은 단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며느라기>에서도 지은이는 일상에서 가장 평범한 순간의 균열을 탁월하게 포착한 본격 결혼 문화 비판 서사를 발견한다. “남성의 생애주기에서 돌봄노동이 고갈되는 일이 없도록” 여성 가족을 돌려쓰는 가부장과 협상하고 때론 갈등하며 ‘결출육’(결혼·출산·육아)을 하는 여성이나 그렇지 않은 여성 모두가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상’으로 쉽게 간주된다.

경선 작가의 <데일리 프랑스>에서 여성 주인공은 프랑스 길거리에서 ‘아시아 여자’의 지위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경선 작가 제공
경선 작가의 <데일리 프랑스>에서 여성 주인공은 프랑스 길거리에서 ‘아시아 여자’의 지위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경선 작가 제공
나쁜 남자의 곁에 머물며 “부단한 치유 활동”으로 ‘성녀’가 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 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웹툰과 교차해 엮어내는 솜씨를 볼 때, 본명을 감춘 이 책의 지은이는 전문적인 비평의 훈련을 거친 이로 짐작된다. 지은이 ‘탱알’은 한국에서 잡지 기자로 일했고, 경력을 막 쌓던 중 임신으로 ‘결혼 이민’을 해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막장 스토리’와 비교하면 오히려 상식적인 축에 드는 시가를 만난 여성 주인공은 왜 여전히 위화감을 느끼는지 질문한다. 수신지 작가 제공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막장 스토리’와 비교하면 오히려 상식적인 축에 드는 시가를 만난 여성 주인공은 왜 여전히 위화감을 느끼는지 질문한다. 수신지 작가 제공
그의 국경을 넘는 글로벌 체험은 ‘헬조선이냐 탈조선이냐’는 주제 아래 경선 작가의 <데일리 프랑스>를 다룰 때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작가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자전적으로 그린 이 웹툰을 설명하며 지은이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이라는 개념을 쓴다. “사회적 소수 집단에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언어적·비언어적 차별”을 가리키는 이 말은 무의식적이고 의도치 않은 차별까지 포함한다. 인종차별과 결합된 서양식 성차별에서 보듯 ‘마이크로어그레션’은 특히 아시안 여성에겐 더 큰 일상의 위협이 된다. “완벽하게 안전한 지지대가 되어줄 사람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그의 경험담은 ‘헬조선이냐 탈조선이냐’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지은이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여성 캐릭터를 제거하는 한국의 남성 서사를 지독하게 비판한다. 성별 권력을 고려하지 않는 퀴어 담론이 여성 퀴어를 대변하지 못한다며 한국의 소수자 담론이 가진 한계도 지적한다. 나아가 ‘여성 자신’ 역시 넘어야 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 여성혐오라는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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