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가 버린 사람들-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
데이비드 굿하트 지음,김경락 옮김/원더박스·2만2000원
<파이낸셜타임스> 기자 출신의 정치평론가 데이비드 굿하트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지지한 사람들을 변호한다. 그들이 진보진영이 포함된 엘리트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원제 <어딘가로 가는 길>에서 ‘어딘가’의 ‘섬웨어’(somewhere)가 바로 그들이다.
섬웨어는 장소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머문 사람들을 말한다. 섬웨어는 “교육 수준이 낮고, 뿌리 애착이 강하고, 정서적으로 보수에 가깝다.” “수십년동안 사회경제적 지위가 낙후됐지만, 공론장에서도 소외된” 반발이 이들로 하여금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만들어내게 했다.
아무 곳이나 갈 수 있는 ‘애니웨어’(anywhere)가 그 대척점에 있다. “교육수준이 높고 이동성이 강하고, 자율과 개방을 지지하고, 사회변화에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애니웨어가 그동안 주도한 사회·정치·문화가 섬웨어들의 백래시를 불러냈다고 굿하트는 주장한다.
지난해 연말 영국 시민들이 런던 다우닝가의 총리 관저 앞에서 ‘유럽연합(EU)의 장단에 춤추지 말라’ 등 팻말을 들고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이미 1970년대부터 나타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네이티비즘’(nativism, 토착주의) 담론은 이런 섬웨어/애니웨어 담론을 말해왔다. ‘정치적 올바름’은 애초 70년대 소수집단 등 약자들에 대한 공격과 불이익을 막기 위한 언행이나 정책들을 일컫는 진보 진영의 용어였다. 이는 곧 진보 진영 내에서도 이런 가치에 대한 교조주의를 일컫는 풍자어로 바뀌었고, 급기야 보수 진영이 진보의 ‘정치적으로 올바른척 하기’를 비꼬는 말로 자리잡았다. 진보 진영이 사회의 평범한 다수층보다는 특정 소수자 집단들의 이해만을 강조하는 가치에 매몰됐다는 비판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기존 중하류층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현상은 이런 담론에 불을 지폈다. 이는 ‘이 땅의 주인이 우리 사회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자’는 토착주의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트럼프와 브렉시트는 그 결과이다. 이로 상징되는 서방 선진국에서 포퓰리즘의 부상은 보편적 인권, 다원주의, 개방 등 서구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이뤄온 성과를 되돌리는 조류로 우려된다. 굿하트는 이런 견해를 거부한다. 섬웨어의 다수는 온건한 포퓰리스트이며, 인종·성차별 반대, 성소수자 수용 등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에 근접한다고 통계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대규모 이민에 반대하고, 보편적 인권도 좋지만 시민권도 존중받아야 생각한다. 그래서, 인종차별주의적 민족주의는 반대하나, 국가와 사회의 공공성 확대를 주장한다. 트럼프가 이민에는 강경하나, 공화당의 기존 보수들이 주장하는 사회복지 축소에 반대하고 성소수자 문제에서도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드러난다. 유럽의 포퓰리즘 정당들도 절반은 좌파 포퓰리즘 정당이고,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도 기존의 극우적 색채를 탈색하고 있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당은 새로운 사회주의”이고, “노동 계층이 핵심 지지층이다”.
굿하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부른 요인들인 이민·가족·세계화(자유무역)·능력주의 사회 등을 중심으로 균형을 찾자는 것이다. 그는 선진국에서 이민은 이제 제한해야 하고, 이민자 사이의 혜택 역시 차별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하는 여성 위주의 가정 정책도 전통적 중하류층들에게 불리하다고 지적한다. “성평등과 여성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부부 중 한쪽이 집에 머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섬웨어들의 복지를 위해 지역경제 재건과 지방자치 확대를 지지한다.
사실 굿하트가 제시하는 것들은 이민 문제만 제외하고는 좌파 정당과 진보 진영의 주장들이다. 그는 오히려 좌파의 전유물같은 주장의 실현을 섬웨어들의 분노와 포퓰리즘 정당에서 찾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섬웨어의 분노와 불평등을 만든 것은 애니웨어의 다수인 능력주의에 기반한 ‘진보적 개인주의’ 그룹이 빚어낸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진보적 개인주의’에서 ‘진보’는 사회의 공공성 확대가 아니라 능력있는 개인을 신장시키는데로만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온갖 착종되는 가치와 조류도 굿하트가 진단하는 지점의 길목에 우리도 들어섰다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