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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국민볼펜’ 한 자루에 응축된 웃픈 한국현대사

등록 2019-12-27 05:00수정 2019-12-27 20:48

돛과 닻 제공.
돛과 닻 제공.

모나미 153 연대기
김영글 지음/돛과닻·1만2000원

1963년 5월1일, 모나미 153이 한국의 문구시장에 상륙했다. 대박이었다.

김영글의 반(半)소설 <모나미 153 연대기>는 ‘국민볼펜’ 모나미를 뼈대로 ‘칼의 시간’(1960~80년대)이 빚어낸 ‘웃픈’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팩트’와 ‘허구’를 절묘하게 뒤섞어 경계를 허물고,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킨다. 낄낄거리며 경계심을 푼 순간, 모나미 153이 ‘관여’했던 시대의 위선을 찌르는 예리한 문장이 훅 들어온다.

153의 탄생 ‘설화’부터 보자. 153의 첫 출시 가격은 15원(당시 신문 한 부와 동일 가격)이었고, 볼펜은 제조사(광신화학공업사)가 크레파스·연필에 이어 내놓은 세번째 제품이었다. 성과 속을 아우르는 의미도 있다. 1+5+3=9. 화투의 아홉끗(가보)은 행운을 부르는 숫자로 여겨져 왔다. 갈릴리호수에서 허탕을 치던 어부 베드로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예수의 말 한마디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153마리)가 잡히는 ‘물증’이었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생선인 ‘베드로 피쉬’를 먹은 손님들은 팁으로 153세겔을 놓고 간다나.

153은 끈적끈적한 잉크처럼 현대사에 얼룩져 있다. 153이 문구류로선 처음으로 정부의 품질 인증(KS 마크)을 받았던 1968년은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 해. ‘반복과 암기’라는 근대적 근면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은 153으로 50번씩 교육헌장을 베껴써야 했다. 강제철거를 목도한 기자 조세희가 귀가길에 볼펜 한 자루와 노트 한 권을 사지 않았더라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런 공로로 조세희가 동인문학상을 받던 1979년, 153도 ‘예술참여문구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으나 30년 뒤에도 용산 참사 같은 철거폭력이 자행됐으니 마치 죽지 않는 저주를 받은 ‘쿠마에 무녀’처럼 “제 몸으로 한 번 써낸 끔찍한 이야기를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다시 쓰는 환각”의 고통을 반복해야 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어떤가. 수정 가능한 연필 아니라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김기설의 유서를 놓고, 공안 당국은 엉터리 필적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권력이라는 신비의 지우개는 볼펜 아닌 어떤 것으로 쓰여진 단단한 진실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153은 온몸으로 증언했던 것이다.

153은 지금도 생산되고 있지만, 소설 속에선 1992년 단종되는 걸로 나온다. 그동안 팔린 수십억 자루의 볼펜들은 이근안의 고문 기구, 칼(KAL) 폭파범 김현희의 자살 도구, 아이들의 물총 장난감 등 기기묘묘한 용도로 쓰이며 기기묘묘한 현대사를 견뎌왔다. 작은 수첩처럼 생긴 이 책은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동네책방과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살 수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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