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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페미니즘은 지침이 아니라 선물이다”

등록 2020-01-31 06:00수정 2020-01-31 10:29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 북토크 현장…70년대 미국 역사적 맥락과 한국 비교
“한국 여성운동 안에서 섹슈얼리티와 정치경제학 관계 다루는 분석 필요해”
책도 생물이다. 글이 나오게 된 사회적 맥락과 함께 생성, 성장, 소멸 그리고 재탄생의 길을 걷는다. 지난해 말 나온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도 마찬가지. 한국 사회 레즈비언 페미니즘 운동사 속에 독자들의 토론과 논쟁이 한창이다.

이 책은 197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레즈비언 페미니즘’ 정치학 문헌 4편을 묶은 것으로 샬럿 번치, 앤 코트, 에이드리엔 리치, 모니크 비티그의 글들을 모았다. 박미선 한신대 영문과 교수는 “지난 세기 레즈비언 여성/페미니스트들이 전수한 인식론적 지평의 핵심을 담은 글들이자 이론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들은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강제적 이성애’가 여성억압의 뿌리라는 데 공감하지만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친다. 리치는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에 나름의 방식으로 맞섰던 여성들의 저항과 성적 유대의 경험을 ‘레즈비언 연속체’로 연결하면서 역사적, 학문적으로 삭제되어 왔던 ‘레즈비언 존재’를 드러내는 한편, 비티그는 보부아르의 논의를 이어 ‘여성’이란 만들어진 계급적 범주를 해체하자고 한다. 번치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통해 남성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레즈비어니즘을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실천으로 강조한 반면, 코트는 ‘누구와 관계를 맺는가’보다 성역할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급진적 실천’을 할 때 레즈비언이 비로소 페미니즘 주체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에서 북토크. 꼴제공
지난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에서 북토크. 꼴제공

편역자인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는 책 발간 뒤 북토크와 강의를 거듭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사를 점검하는 자리로서 마련된 북토크 현장을 일부 옮긴다. 지난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에서 연 이날 행사엔 나영정 활동가, 이진화 활동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한 더지 등이 참석했다. 나영 활동가는 “이 글들이 나오던 1970~80년대 당시 미국엔 여성 운동가들이 마르크스주의 활동이나 흑인인권운동, 반전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운동 사회 내에서조차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재함을 느끼고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했다”며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통해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게 되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4개의 글 모두 여성을 생물학적인 피해자로 위치짓기보다 ‘여성’이라는 범주와 조건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정치적인 운동으로 만들까 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에서 연 행사에 토론자로 참석한 나영정(왼쪽부터), 이진화, 나영 활동가. 사진 이유진 기자
지난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에서 연 행사에 토론자로 참석한 나영정(왼쪽부터), 이진화, 나영 활동가. 사진 이유진 기자

한국에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한국의 레즈비언 운동사를 간단히 들려준 나영정 활동가는 “2003~2006년 사이 탄생한 ‘소수자 여성운동’ 그룹은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제도화를 추진하던 주류여성운동과 거리를 두었으나 여성운동과 분리되어 여성운동 안에서 논쟁과 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2015년 양성평등기본법 논란이 있기까지는 사실 10년간 소수자 여성운동과 주류 여성운동이 거의 만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영 활동가는 “한국의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에서도 섹슈얼리티와 정치경제학의 관계를 제대로 문제제기하거나 정치화하는 활동이 부족했다”며 앞으로 이에 관한 분석과 운동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전후 미국의 논쟁처럼 2000년대 초 한국에서도 ‘레즈비언이 여성 운동의 주체일 수 있는가’, ‘레즈비언 운동이 페미니즘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한국여성학회가 연 추계학술대회에서 ‘참 레즈비언’ 논란이 나와 해를 넘기며 논쟁한 바도 있다. 나영정 활동가가 “당시 ‘참 레즈비언’은 우울해야 하고, 성을 너무 밝혀서도 안 되고 공부를 너무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고 말하자 폭소가 터졌다. 레즈비언 운동의 흐름 안에서는 레즈비언이 처한 삶의 조건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이론 놀음’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즘 운운’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입장들이 나오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당시 이런 분위기가 한편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이론적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갱신하고 확장시킬 기회 자체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다시 미국의 1970년대로 돌아가자면, 시인이자 연구자였던 에이드리언 리치는 레즈비언으로서 삶의 맥락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썼다. 이진화 활동가는 “리치는 학계에서 논의되는 페미니즘 안에서 레즈비언의 존재와 서사가 비가시화되어 온 흐름에 개입하고자 페미니즘 학술 저널 한 코너에 자신의 에세이를 제출했다”고 글의 배경을 설명했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운동가였던 오드리 로드와 백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에이드리언 리치가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는 데서 인종을 가로질러 연대가 가능했던 지점을 발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거라고 했다.

나영 활동가는 “페미니즘은 지침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앤 코트의 말처럼 “여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자격 검증이나 구분 대신 누구나 자율적으로 이 운동에 함께할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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