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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키라고 만든 선? 넘으라고 있는 선!

등록 2020-02-28 05:01수정 2020-02-28 10:21

“나는 아나키스트요” 선언한 작가 오후의 영화 읽기
삶의 태도로서 존엄 향한 저항적 이야기 11편 소개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오후 지음/사우·1만6500원

“나는 ‘아나키스트’다. 농담이 아니다.”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의 첫 장을 열자마자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국어사전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와 같은 말로 설명되기에 이 선언은 얼핏 과격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실은 아나키즘이 “지배에 대한 저항,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고 설득하려 애쓰는 대신 지은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는 무정부주의자예요”라고. 출발점에서 이미 선을 과감히 넘은 지은이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나키즘이라고 진지하게, ‘궁서체’로 말을 걸어온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신뢰를 잃은 사회에서 선을 넘어가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불안하고 날카롭다”고 진단하며 아나키스트의 태도와 시선으로 독자와 마주하겠다고 밝힌다.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한 3명의 흑인 여성이 ‘차별’을 딛고 일어선 &lt;히든 피겨스&gt;(2016) 한 장면. &lt;한겨레&gt; 자료사진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한 3명의 흑인 여성이 ‘차별’을 딛고 일어선 <히든 피겨스>(2016)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쓴 작가 오후의 신작으로, ‘나와 당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11개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각 장을 11편의 영화로 시작한다. 지은이와 독자는 서로에게 낯선 타인이기에 공유할 만한 소재로 둔 장치인데, 각각의 영화를 보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캐릭터든 배경이든 주요 사건이든 지은이는 우리의 삶 전반을 살피는 데 실타래를 풀 만한 소재를 자유롭게 포착해낸다.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한 3명의 흑인 여성이 ‘차별’을 딛고 일어선 <히든 피겨스>(2016·사진)로 말머리를 잡은 뒤, 현 정부의 남녀동수 내각 공약과 실현을 들여다보며 성별 갈등을 짚고, 남자라는 사회적 강자이자 주류였기에 어떤 특정 조건에서 불편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는 자기 인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무리 없이 흘러간다. 이성계라는 굵직한 역사적 인물을 제쳐놓고 사극에서 비전형성을 띤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을 이야기하다가 “유학자의 신분으로 유학에 반기를 든” 명나라의 이탁오를 조명하는 데로 나아가며 사회가 정한 가치관 속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일깨우기도 한다.

지은이는 각 장에서 자본주의, 종교, 정치와 선거, 법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범주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권위나 원칙, 기준에 거리를 벌리며 고유의 시선과 태도를 견지한다. 현실에 대해 군더더기 없는 냉철한 진단을 내리면서도 때때로 “큰 상처에 꼭 큰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다. 작은 위로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삶을 견뎌낼 수 있다”며 은은한 온기를 전하고, “평소에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을 어겨보기를 진지하게 권한다” “법을 어겨봤을 때 그 법이 왜 필요한지를 깨닫기도 한다”고 조언하며 해방감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보조 캐릭터가 정해진 역할만 수행하는 데 머문다면,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설 수 있는 한 가장 끝에 서서 선을 넘어 뛰쳐나갈 것처럼 행동하면 세상은 생각보다 많이 바뀌며, 그러다 “자신의 본모습을 직면하는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은 자기 안에 깃든 편견과 선입견을 부수며 ‘선 너머’로 나아가는 데 담백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문장에 부연된 괄호 안에 스민 과하지 않은 유머가 읽는 재미를 높인다.

강경은 기자 free192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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