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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특별기고] 역병의 재난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한 문학

등록 2020-03-20 06:00수정 2020-03-20 09:23

[책&생각] 중국 소설가 옌롄커 - 코로나19 사태와 문학
전쟁이나 역병 같은 재난기는 작가들이 기꺼이 ‘전사’나 ‘기자’가 되어야 할 때
두려운 것은 문학 주변화 아니라 작가들이 문학의 무능과 무력에 박수치는 것

지난 1월25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텅 빈 다리를 구급차 한 대가 달려가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지난 1월25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텅 빈 다리를 구급차 한 대가 달려가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코로나19 사태와 문학 및 작가의 역할에 관한 생각을 담은 글을 <한겨레>에 보내 왔다. 옌롄커는 <대산문화> 봄호에도 코로나 사태와 관련한 글 ‘국가적 기억상실을 거부한다’를 기고한 바 있다. 일본 문예지 <문예> 4월호에도 같이 실리는 이 글을 김태성 번역가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중국 소설가 옌롄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나는 줄곧 오늘날의 문학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 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위대한 문학이 이미 오래 전에 왕성한 발전을 이루면서 써야 할 작품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 다 썼기 때문이다. 둘째, 위대한 문학은 반드시 그것이 생산되기에 적합한 시대에 생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는 인터넷과 과학기술의 시대로서 또 다른 무언가에 속해 있다. 문학은 그저 이 시대의 주변화한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더 이상 18세기 말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처럼 세계의 무대에서 문화의 기둥이자 주연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을 생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천재들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세태에 거역하면서도 왕성하게 자라고 하늘과 땅을 울리는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위대한 작품을 배출하는 시대는 이미 소리 없이 끝나버렸다. 지금의 현실과 정세는 내가 말하는 위대한 작품을 생산해낼 수 없는 시대다. 세계문학 전체에는 이미 19세기와 20세기의 200년이라는 세월의 영광과 광채가 있었고 인류 역사에는 한 동안 문학을 매우 중시했던 시기가 있었다. 나머지 작가들이 할 일은 최대한 조연으로서 빛나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연극에서 조연이 주연보다 더 빛나기도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예상치 않은 위대함을 위해 글을 쓰되, 주연은 어디까지나 주연이고 조연은 아무리 잘 해도 조연이라는 연기와 역사의 분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주변화를 묵인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작가들이 그저 작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가들이 이 시대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어떤 것들인지도 알게 된다.

지난 1월28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알려진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인적 없는 거리를 마스크 낀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지난 1월28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알려진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인적 없는 거리를 마스크 낀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신종코로나 감염증이 엄습해왔다.

이 질병은 있지 말아야 할 전장의 사방에 갑자기 총성이 울린 것처럼 우한과 후베이, 중국 그리고 세계 전체를 한 걸음 한 걸음 재난의 함정 속에 빠뜨렸다. 중국의 내륙 도시 우한은 이 역병재난의 중심점이 되었고 질병과 죽음이 쓰나미의 핵심처럼 세계 각지를 향해 확장되면서 인류를 마구 습격하고 있다. 아마도 인류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증명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부조리와 도착(倒錯)은 영원히 인류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런 부조리와 도착 속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은 눈을 감지 못했고 슬피 울부짖는 통곡소리와 눈물이 도시의 거리와 시골 백성들의 처마를 울렸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의 의료요원들이 구호와 치료를 위해 가정을 떠나 우한과 후베이로 달려갔다. 생명으로 역병과 죽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료요원들이 희생자의 일부가 되었다. 역병의 근원과 기점이 어디든 간에 그 만연이 중국 특색의 사회구조에서 새어나와 폭발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한이 봉쇄된 뒤로 중국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흩어져 있던 땔나무들이 아주 빨리 한데 묶여 함께 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로 인해 인성의 추악함이 조수처럼, 검은 연기처럼 우리들 사이를 맴돌면서 만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성의 밝은 빛과 순정함도 눈을 찌르는 불빛이 되어 세상과 천지, 사람들과 한 민족의 풀뿌리 같은 민간을 따스하고 환하게 비춰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민족의 힘일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기대하는 인민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달 23일 코로나19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마스크를 낀 남자가 주택가에 세워진 임시 장벽 너머로 주민들에게 채소를 건네주고 있다. 우한/EPA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코로나19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마스크를 낀 남자가 주택가에 세워진 임시 장벽 너머로 주민들에게 채소를 건네주고 있다. 우한/EPA 연합뉴스

총소리 났는데 폭죽이라 쓰는 작가들

이런 힘과 기대 속에서, 문학은 아주 멀고 역병은 아주 가까이 격동하고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거세게 밀려오는 재난 앞에서 문학의 무력과 무능을 실감하게 된다. 문학은 마스크가 되어 역병 지역으로 보내질 수도 없고 진정으로 의료를 위한 방호복이 되지도 못한다. 음식이 필요할 때, 문학은 빵과 우유가 되지도 못하고 채소가 필요할 때, 무나 배추, 시금치가 되지도 못한다. 심지어 사람들이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 떨고 있을 때, 한 알의 신경안정제가 되어주지도 못한다. 왜 중국의 일부 관방 매체와 사유를 거친 민간의 목소리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봉쇄된 우한을 ‘아우슈비츠’라고 칭하는 것일까? 왜 항상 아우슈비츠를 시(詩)와 연결시키는 것일까? 우한과 신종코로나가 이미 하나의 은유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닥쳐온 이번 재난에서 중국 사회는 다른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생사를 통해 아우슈비츠에서도 시를 쓸 수 있을 때는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때의 시는 시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이자 일종의 전달이며 살아 있음이다. 당시 아우슈비츠에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 시가 밖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면 아우슈비츠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무고한 생명이 땅강아지나 개미처럼 파시즘의 발 아래 유린되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달 6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임시 집중치료시설에서 의료진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지난달 6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임시 집중치료시설에서 의료진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우한/AP 연합뉴스

전장에 진정으로 생명을 내놓는 종군기자가 없다면, 그건 정말로 어리석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인류의 재난 앞에서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난이다.

전쟁이나 역병의 재난이 닥쳐왔을 때가 작가들이 기꺼이 ‘전사’나 ‘기자’가 되어야 할 때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총성보다 더 멀리 울려 퍼질 것이다. 이런 다른 목소리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기를 거둬들이게 했고 상대방의 포성을 멈추게 했다. 아이작 바벨과 헤밍웨이, 노먼 메일러, 아이작 싱어, 조지 오웰 등이 그랬다. 반드시 전쟁 중에 기자가 되어야 훌륭한 작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전쟁 중에 죽음을 보지 못하고 총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잔혹하고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심지어 분명히 죽음을 보고 총소리를 듣고도 그 총성을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폭죽소리라고 말한다면 이는 전쟁이나 역병의 재난보다 더 부조리하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일기에서 “오전에 전쟁이 발발했고, 오후에 목욕을 했다”라고 쓰긴 했지만 우리는 그가 부조리에 가장 민감했고 진정으로 부조리를 글로 써낼 수 있었던 작가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총소리를 폭죽소리로 변질시키곤 한다. 심지어 자신의 펜을 들어 총소리를 폭죽이라고 적음으로써 이런 부조리를 증명하기도 한다.

천지가 온통 울음소리인 가운데 누군가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해서 이를 나무랄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수한 진상들이 분명치 않을 때 시인이나 작가, 교수, 지식인 들이 정확한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일찌감치 자신의 선택과 입장, 판단을 밝힌다고 해서 이를 질책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세계에는 추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남극의 나약한 펭귄들 같은 중국 작가들의 유약함과 무력함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중국인과 중국 작가들의 상황은 남극 펭귄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종 이런 상황들이 작가와 작가, 문학과 문학의 우열과 차이를 확연하게 갈라놓기도 한다. 중국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남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심지어 어쩌면 위대한 작품 자체도 다른 목소리일 것이다. 다른 목소리가 없다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위대한 문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어쩌다 뜻하지 않게 한두 권의 위대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다. 중국 작가들의 무능과 무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중국 작가들이 이런저런 포용과 자유를 몹시 아쉬워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없다. 인간에게는 날이 추우면 누구나 추위를 느끼고 날이 따스하면 누구다 그 따스함을 즐기는 공동의 심리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모두가 똑같을 수 있을까? 작가와 문단이라는 이 한가한 집단을 놓고 얘기하자면, 사실 정말로 추운 겨울이 찾아왔을 때, 정말로 날이 추워졌을 때, 나는 남들이 나눠주거나 상으로 준 솜옷을 한 겹 더 껴입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 작가들과 문학의 미묘함이자 난처함이요 서글픔이다. 진정한 추위와 한기 속에서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달랠 솜옷을 하나씩 더 껴입는 것이다.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강변대로가 지난 1월26일 차량과 인적이 거의 끊긴 가운데 황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한/신화 연합뉴스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강변대로가 지난 1월26일 차량과 인적이 거의 끊긴 가운데 황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한/신화 연합뉴스

추위 속 솜옷 한겹 더 껴입은 작가들

1,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모든 작가들이 전선이나 전장으로 달려갔던 것은 아니지만 바벨이나 헤밍웨이, 오웰 같은 사람들처럼 총소리 속에서, 전장에서 펜을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톨스토이가 군대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전쟁과 평화> 같은 작품을 어떻게 써냈을까,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작품을 써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조셉 헬러의 <캐치22>나 보니거트의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카뮈의 <페스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은 작품들이 전부 이런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다른 목소리들은 전부 전쟁과 관련되어 있고 그 주인공들은 병사였거나 포로였고 인류의 질병에 대해 깊은 이해와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서 말하자면 오늘날의 상황이 중국 작가들에게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질의를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작가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소외된 사람, 더 없이 부조리한 역사에 대한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사유를 지닌 작품을 써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중국 작가들은 중국의 현실과 역사 속에서 너무 많은 부조리와 죽음과 재난을 목도했고 너무 많은 역병의 폭발과 죽음, 그리고 이를 망각한 뒤에 다시 발생하는 폭발을 직접 경험하고 목도했다. 이런 일들을 겪고서 우리는 카뮈나 사라마구처럼 인간의 고독과 기억, 인류의 곤경을 사유할 수 있을까? 그들처럼 사람과 현실, 세계의 진실한 상황에 직면하여 창의적인 생각으로 보다 깊이 있는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써낼 수 있을까? 쓴다면 또 어떤 것들을 써낼 수 있을까?

지난 1월29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한 다리 위에서 경찰관이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있다. 우한/AFP 연합뉴스
지난 1월29일 코로나19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한 다리 위에서 경찰관이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있다. 우한/AFP 연합뉴스

솔직히 말해서 중국에는 재능이 넘치는 작가들이 너무나 많다. 중국문학의 문제점은 누가 작가에게 무엇을 써도 되고 무엇을 쓰면 안 되는지 말해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모르고 그럭저럭 되는 대로 사는 것과 어쩔 수 없어서 그럭저럭 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면서도 그럭저럭 사는 것은 별개의 일 중의 별개의 일이다. 나는 자신이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그럭저럭 사는 삶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 오늘날 중국인들의 타성이자 문화이며 유전이자 특징이다. 문학이 무능하고 무력한데 작가들은 이런 무능과 무력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펜과 목소리, 권력으로 부조리와 죽음과 통곡의 악보를 만들어 찬미의 시를 노래하고 있다. 그럭저럭 사는 삶을 위해 영웅의 신발로 죽음과 무덤을 향해 가는 발자국을 덮는다면 이는 문학을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문학을 악행으로 변질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하는 일이다.

두려운 것은 역사 속에서의 문학의 배역이 대체되거나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문학이 무능하고 무력하고 주변화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러한 무능과 무력에 박수를 보내고 무력과 무능을 향해 큰 소리로 “좋아! 아주 훌륭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문학의 마지막 존엄과 체면을 깎아내리면서 문학이 쓰러져 죽는 것을 목도한 뒤에는 스스로 자신이 문학을 구한 작가이자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국문학의 유형이다. 작가들 스스로 문학의 회자수(劊子手)가 되고 있다. 중국문학의 비애는 수많은 작가들이 추위와 한기 속에서 남들보다 솜옷을 한 겹씩 더 껴입고 있다는 데에 있다. 중국문학의 출구 역시 모든 사람들이 추위와 한기에 떨고 있을 때 합 겹씩 더 껴입고 있는 그들이 스스로 솜옷을 벗어버릴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러지 않고는 문학에 기대할 것이 없다. 심지어 문학이 악행이 되고 만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중국 소설가 옌롄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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