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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굴뚝새 노래에 마음의 어둠을 걷고

등록 2020-03-20 06:00수정 2020-03-20 09:11

글·그림으로 엮은 열두달의 동식물 관찰기록
25년 우울증 환자가 숲에서 얻은 ‘항우울제’ 복용기

야생의 위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심심·1만8900원

자연의 치유력은 말 보탤 것 없이 ‘진리’이다. 식물이 발산하는 자연살균제 피톤치드가 만발한 숲을 거닐며 나무와 꽃을 들여다보고 흙을 만지고 새의 노래를 듣고 낙엽의 그윽한 냄새에 킁킁거리다보면, 우울증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쾌감을 선사하는 도파민이 증가하며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암세포를 잡는 백혈구의 활동이 늘어난다.

영국의 ‘박물학자’ 에마 미첼은 잉글랜드 남동쪽 숲 근처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했고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대해 오랫동안 글을 써온 그는 산책길마다 풀꽃, 나무, 곤충, 새와 사슴, 들쥐와 족제비 같은 ‘야생 거주자’들의 삶을 관찰한다. 자연에 목마른 독자들이 보기엔 이상적인 삶인데, 반전이 있다. 저자는 25년 동안 우울증을 앓아왔다. 자신이 ‘검은 개’로 명명한 우울증의 덫에 걸릴까봐 늘 노심초사한다. 한번 걸리면 산책은 고사하고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힘겨워진다. 기분은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들쥐를 주메뉴로 한 올빼미의 저녁식사를 목도한 기쁨에 몸을 떨고, 영국에서 번식 가능한 개체가 10쌍뿐이라는 황새 부부의 출현에 행복해하고, 키낮은 타래난초를 발견하고 환호하다가도, 이따금씩 감정의 찌꺼기가 눈물로 뭉쳐 폭발한다. 아프리카에서부터 9000㎞ 넘는 먼 거리를 날아온 제비를 보면서 하염없이 울고, 호숫가 나이팅게일의 노래소리에도 목놓아 운다.

지은이 에마 미첼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까지 한달 동안 9000km를 날아 온 제비를 보면서 눈물 짓는다. 심심 제공
지은이 에마 미첼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까지 한달 동안 9000km를 날아 온 제비를 보면서 눈물 짓는다. 심심 제공

4월 영국 브래드필드 숲에서 개암나무가 새잎을 틔웠다.
4월 영국 브래드필드 숲에서 개암나무가 새잎을 틔웠다.

검은 개와의 힘겨운 투쟁기임에도, 이 책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숲은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감춘 텍스트이며 한없이 넓은 캔버스다. 그는 1년 열두달 동안 직접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며, 위트를 살짝 얹은 감칠맛 나는 묘사를 선보인다. 매력적인 문장을 잠깐 맛보자. “나뭇가지들은 식물성 구슬을 잔뜩 꿴 화려한 목걸이처럼 보인다”(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산사나무), “채널이 제대로 안 맞춰져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같다. 접시에 떨어진 수은방울처럼 움직인다”(하늘을 뒤덮은 찌르레기떼), “새로 돋아난 나뭇잎 속을 헤엄치고 싶다. 낙엽무더기와 균사체의 월드와이드웹 속에 뛰어들어 나도산마늘 위로 초록과 금빛의 봄햇살이 쏟아지는 습지로 솟구쳐 나오고 싶다”(5월의 숲에서), “암컷은 발광효소로 복부에서 녹색 불빛을 내고 수컷은 암컷을 찾아나선다. 딱정벌레들의 깜찍하고 음란한 조명축제라고나 할까”(여름밤의 반딧불이).

검은수레국화 이삭 안에서 무당벌레 다섯마리가 한데 모여 겨울잠을 자고 있다. 심심 제공
검은수레국화 이삭 안에서 무당벌레 다섯마리가 한데 모여 겨울잠을 자고 있다. 심심 제공

저자는 야생의 삶을 문장으로 엮어가며 자신의 어두움을 다스린다. “음침한 홍차처럼 우러나는” 계절성정서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이듬해 봄을 준비하려 돋아나는 사양채와 흔들꼬리의 새순을 늦가을 오솔길에서 찾아낸다.

물론, 야생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는 널려 있다. 무작위로 뿌려댄 살충제와 제초제는 초원과 습지를 파괴하고, 목초지를 집약농업 용지로 개간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영국이라지만 야생으로 보존된 땅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람들은 팔을 걷어붙인다. 살충제 살포와 곤충 생식과의 관련성을 파헤치려고 시민들 스스로 ‘빅 버터플라이 카운트’라는 주민과학프로젝트를 꾸렸다는 얘기가 인상적이다.

굴뚝새. 에마 마첼은 다양한 동식물을 직접 스케치하고 채색했다.
굴뚝새. 에마 마첼은 다양한 동식물을 직접 스케치하고 채색했다.

우울증은 만성질환에 가까워서 완치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우울증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스트레스와 불안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자연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시선을 낮추고 쭈그려 앉아보자. 수많은 “매혹적인 생명체”들이 “나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분주하게 행동하고 있다. 생명의 보편성. 그 깨달음이 외로운 당신에게 주는 위로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그림·사진 심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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