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관련 제4차 비상경제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본소득 논의가 뜨겁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비상상황을 맞아 긴급재난지원금을 전국민에게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야에서 나오는 가운데 청와대도 국회와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할 것이라고 7일 밝혔다. 이 재난수당은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있지만 정부가 하위소득 70% 이상 가구에 선별적으로 현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촉발한 ‘보편 대 선별’ 논쟁은 기본소득 논쟁의 핵심에 해당한다. 그동안 전국민 기본소득 관련 논의가 지금처럼 구체적으로 진행된 적은 없었다. 논의를 본격화하는 차원에서 기본소득 개념을 충실히 설명해온 중요한 책들을 모아봤다.
<기본소득이 온다>는 ‘한국적 기본소득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지은이 김교성(중앙대), 백승호(가톨릭대), 서정희(군산대), 이승윤(이화여대) 교수는 기본소득 관련 논문을 꾸준하고 활발하게 발표해온 사회복지학자들이다. 책은 기본소득을 “정치공동체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주기적으로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이라고 정의한다.
기본소득 운동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가 중심인데, 한국은 2010년 상파울루 대회에서 17번째 가입국으로 승인받았다. 2016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서강대에서 아시아 최초의 대회를 열었고 정치권에서 국회의원들도 이즈음부터 기본소득모임을 시작했다. 국내 정치권의 관심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는 이재명 시장이 2016년 1월 실시한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이었다. 이 책은 한국 기본소득 논의 확산의 전략적 행위자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이재명 성남시장을 꼽는다.
기본소득이 도입된 한국형 복지국가의 설계도도 제시한다. 지은이들은 모든 시민에게 중위소득 30% 이상에 해당하는 현금 지급을 제안하는데, 2017년 기준으로는 월 50만원이다. 이 설계에 따르면 노동 및 자산조사에 입각한 현금형 사회부조 급여는 기본소득으로 대체되고 연금과 실업급여 일부는 조정되며 교육, 보육, 의료, 직업훈련 등의 사회서비스는 적극 확충된다.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급여 대상을 선정하기 위한 자격심사가 필요하지 않아, 사회부조의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경제학>은 철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경제학으로 보는 ‘기본소득의 정석’이다. 지은이 강남훈 교수(한신대 경제학)는 기본소득을 “자격 심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노동요구 없이 무조건 전달되는 정기적인 현금 지급”이라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이 의료, 교육 등 사회서비스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2016년 서울에서 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결의된 이 내용은 기본소득이 다른 사회서비스를 대체한다는 우파 버전의 비판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기본소득은 “마련된 재원을 균등하게 통장에 입금”하는 간단하고 단순한 정책이지만 효과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다. 지은이는 ‘재정환상’의 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한다. 예컨대 기본소득제 아래서 정부에서 30만원을 받는 사람이 세금 36만원을 부과받았다고 치자. 그는 모두에게 주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만 돈을 주는 선별복지제도 아래서 6만원의 세금을 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세금을 낼 때는 자신이 받은 기본소득 30만원은 떠올리지 않고 36만원의 세금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세금은 6만원으로 동일한데 보조금과 세금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환상’ 때문에 기본소득을 “세금 폭탄”이라 일컫는 선동에 쉽사리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강 교수는 기본소득의 경우 선별적인 소득보장과 재분배 효과가 동일한 반면, 행정비가 적게 들고 낙인 효과가 없어서 인권 측면이나 불공정을 없애는 데 크게 효과적이라고 본다. 월 30만원 정도의 낮은 기본소득일지라도 사회적 합의에 도달한다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것이라고 그는 예측했다. 중산층을 포함해 소득안정성이 높아지며 돌봄이나 봉사 등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명문대에 무리해서 아이를 넣겠다는 부모는 줄어들 것이며 비정규직 연인들도 정규직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644쪽에 이르는 두꺼운 ‘기본소득 사전’으로서 <21세기 기본소득>은 기본소득 주창자 중 한명인 벨기에 정치철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와 벨기에 정치학자 야니크 판데르보호트가 12년 동안 준비한 역작이다. 기본소득의 역사, 철학, 경제적 당위성, 정치적 입장, 실현 가능성 등을 다룬다. 21세기가 기본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과 각종 임금보조금, 근로소득세액공제 등 대안들을 비교하며 기본소득이 더 우세한 점을 논증한다. 그의 이론을 보면, 기본소득은 자발적인 여가를 선택하는 폭을 넓혀 일자리가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병이 난 사람이나 일을 하고 싶어 병이 난 사람 모두를 치유하는 제안이란 것이다.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 “기본소득이 가장 먼저 도입될 나라가 어디일지는 예견할 수가 없다”며 “그 나라는 사상가들, 활동가들, 용기와 지성을 겸비한 정치가들 사이에 아주 효율적인 협업이 생겨날 수 있는 나라여야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과연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영국 런던대학 교수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공동창립자 겸 명예공동의장인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기본소득이야말로 행정비용을 줄이면서도 직접적이며 투명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불안과 경제적 불확실성을 타개하는 정책이라고 밝힌다. 21세기 인류에게 밀어닥친 위험은 전통적 형태의 사회보험을 무력하게 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 벤처 사업가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우파적이라 풀이하는 이들에게 가이 스탠딩은 “조잡한 추론”이라며 선을 긋는다. 그 또한 다른 기본소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수단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그는 기본소득이 어디까지나 소득 보장에 대한 경제적 권리여야지 상환에 이용되거나 담보가 되어선 안 된다고 밝힌다. 파일럿 제도가 필요 없다고 본 필리프 판 파레이스와 달리 가이 스탠딩은 파일럿 제도 실시를 유용하다고 본다. 단, 기본소득은 정액이며 예측 가능하게 안정적으로 지급돼야 하며 일정 기간 매달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개별적’ 지급도 중요한 요소다. 성별불문 동등하게 지급돼야 하며 가구, 가족 같은 개념에 적용돼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지금 바로 기본소득>은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금민 소장이 쓴 새책이다. 법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한 그는 기본소득이 정당한 권리인 이유를 검토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기본소득 개념을 제시한 금 소장은 2009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BIKN)를 창립한 이들 중 한명이며 지금도 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는 이번 책에서 “모두의 몫”에 대한 “무조건적·보편적·개별적인 평등분배”를 강조한다. 지구, 토지, 천연자원, 생태환경 등 인류 모두에게 속한 자연적 기초이자 인류 모두의 것에서 흘러나온 수익으로서 ‘공통부’란 특정인의 성과로 귀속시킬 수도 없는 수익이라는 것이다.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라는 원칙에서 기본소득은 공통부의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아이디어다. 그는 “시민이 무조건적·보편적·개별적 권리로서 정치적 시민권을 보유하지만 정치적 시민권의 기초가 되는 공통부에 대한 무조건적·보편적·개별적 배당권은 보유하지 않는다”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중대 결함”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재벌총수한테 기본소득 왜 줘야 할까
LAB2050 윤형중 정책팀장이 답하는 기본소득 기본질문
-‘재난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인가?
재난기본소득은 재난을 계기로 시작하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지급하는 보편성, 심사나 노동 요구를 하지 않는 무조건성, 개인에게 지급하는 개별성, 현금으로 지급하는 현금성,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지급하는 정기성 등 5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부가 발표한 긴급재난지원금처럼 대상을 선별해 지급하는 수당은 기본소득이라고 볼 수 없다. 기본소득의 가장 기본적 속성인 무조건성, 보편성 등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수당을 지급하더라도 일회성이라면 ‘정기성’을 충족하지 못해 기본소득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논의되는 모두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선별적으로 환수(과세)하는 방안이 도입될 경우 세금 제도의 개편을 통해 지속적 재원을 확보한다면 이는 기본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 부자에게도 기본소득을 주는가?
2011년 무상급식 논란 당시 가장 유명한 질문이 ‘왜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의 자녀에게도 무료 급식을 주는가’였다. 그땐 무료 급식 대상을 선별하면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다는 게 중요한 반박 논리였다. 기본소득에선 보편성의 근거가 좀 달라진다. 부자는 기본소득의 재원에 더 큰 기여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본소득의 권리에서 제외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부자를 선별하는 비용이 큰 반면에, 부자에게 더 과세하는 것은 손쉽고 비용도 덜 든다.
-기본소득을 주면 일을 기피할 텐데?
아직 전세계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 사례가 없고, 현실적으로 기본소득은 낮은 금액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본소득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는 가까운 미래에 어렵다. 대신 기본소득이 개개인에게 지금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게 하거나, 돌봄과 학업 등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한 기반이 될 순 있다.
-국가 재정은 고갈되는 것 아닌가?
국채를 마구 찍어 기본소득을 주겠다면 정부 빚이 늘어날 수 있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기본소득론자는 찾기 힘들다. 기본소득은 지속적인 재원을 마련하는 구체적인 설계안에 따라 다양하고, 현대화폐이론(MMT)을 주장하는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기본소득의 재원을 세금과 기존 재정에서 찾고 있어 정부 빚이 늘어날 우려는 없다.
-기본소득은 좌파 정책인가, 우파 정책인가?
둘 다 있다. 역사적으로 기본소득 논의를 이끌어온 세력은 주로 사회주의 계열 좌파였으나, 1960년대에 신자유주의와 시카고 경제학파의 대가인 밀턴 프리드먼이 저소득층에겐 과세하는 대신에 보조금(마이너스 세금)을 주자는 주장을 하면서 기본소득 논의의 이념 지형이 다양해졌다. 우파 쪽에선 복지 체계를 과감히 축소하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기본소득 실험으로 주목을 받은 핀란드 역시 우파 정부가 복지에 대한 의존을 낮추려 기본소득에 주목한 경우다. 좌파 쪽에선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고,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기본소득에 주목한다. 누가 기본소득안을 구체화하느냐에 따라 좌파인지 우파인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회복지를 위축시킬까?
우파적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사회복지가 위축될 수 있으나, 전세계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와 각국 네트워크의 전문가들은 주로 기본소득과 사회복지와의 병행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사회복지에 쓸 돈을 기본소득에 쓰면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증세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단 반박도 있다.
-기본소득은 포퓰리즘 정책인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두에게 현금을 준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은 대표적인 인기 영합적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일부 고소득층만 손해를 입고, 거의 대다수가 이득을 얻음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치권에서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드문 상황을 보면 오히려 인기에 비영합적인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윤형중 LAB2050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