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5월의 구조신호, 메이데이! 메이데이!

등록 2020-05-01 06:01수정 2020-05-01 15:40

미국의 노동계급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가 쓴 메이데이 관련 글 11편
노동해방 ‘붉은 메이데이’와 공유지 회복 ‘녹색 메이데이’ 가치 되살려

메이데이

피터 라인보우 지음, 박지순 옮김/갈무리·1만8000원

“우리는 햇빛을 느끼고 싶다./ 우리는 꽃향기를 맡고 싶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것을 원하리라 확신한다./ 또한, 우리는 여덟 시간의 노동을 쟁취해야만 한다.” (1869년 설립한 미국 ‘노동 기사단’이 부른 ‘8시간의 노래’ 가운데)

일하고 쉬고 노는 삶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가? 1886년 5월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려고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이 행진을 벌였다. 이날 경찰의 손에 노동자들이 죽었고 5월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는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무장 경찰이 투입된 가운데 누군가 다이너마이트 막대를 던진 직후 지옥문이 열렸다. 지금까지도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을 놓고 불공정한 재판이 열렸고 유죄를 선고받은 4명은 이듬해 11월11일 “검은 금요일”에 교수형으로 죽었다. 미국 정부는 1958년, 노동절에 맞서 5월1일을 ‘법의 날’로 만들어버렸다.

메이데이를 촉발한 헤이마켓 사건을 다룬 삽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메이데이를 촉발한 헤이마켓 사건을 다룬 삽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전설적인 노동계급 역사가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직계 제자이자 독보적인 노동사가인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78). 그는 <히드라>(2001, 한국어판 2008) <마그나카르타 선언>(2008, 2012) 등 저서를 통해 다중의 저항과 공유지의 역사를 발굴한 학자로 한국에도 이름을 알렸다. <메이데이>는 1986년부터 2015년까지 그가 쓴 메이데이 관련 글과 연설문 11편을 묶은 것이다. 이 책 또한 전작처럼 역사 속에 은폐된 민중사를 되살려낸다. 약 30년 동안 그가 세심하게 복원한 메이데이는 ‘적녹보라’ 연대로 보아도 무방하다. 노동계급, 공유지 회복, 페미니즘의 가치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인디언, 불평분자, 동성애자, 탈주 노예 등이 어울렸고 사람들은 함께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인디언, 불평분자, 동성애자, 탈주 노예 등이 어울렸고 사람들은 함께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금까지 메이데이가 주로 노동자의 시위와 저항사를 기념하는 계급투쟁의 ‘붉은색’이었다면, 라인보우는 중세 공유지에서 벌인 축제와 관련된 ‘녹색’의 이야기까지 찾아 보여준다. 붉은 메이데이는 잘 알려진 대로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시위와 탄압의 장면이 중심에 있다. 이에 견줘 지은이가 새롭게 강조하는 녹색 메이데이는 영국 출신의 이민자로서 작가이자 사회개혁가로 활동한 토머스 모튼(1579~1647)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룬다. 모튼은 1624년 메리마운트(현재 매사추세츠주 퀸시)에 정착해 그곳의 원주민과 평화롭게 거래하며 어울려 살고자 했다. 그는 1627년 인디언 친구와 함께 길이 24m짜리 ‘5월의 기둥’(메이폴)을 세우고 화환으로 치장한 뒤 꼭대기에 수사슴의 뿔을 못박았다. 인디언, 불평분자, 동성애자, 탈주 노예 같은 이들이 은신처 삼아 그곳에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여러날 함께 술 마시며 야성적으로 춤을 췄다. 이들의 모임은 “메리마운트의 무지개 회합”으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모튼의 코뮌은 권력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미국의 첫 메이데이는 핏빛 결말을 맺었다. 한발 더 나아가 지은이는 메이데이가 훨씬 오래 전, 원시공동체의 축제와 휴식에 기원을 둔다고 보았다. 5월1일은 봄의 시작점이고, 메이데이는 그리스 신화 속 마이아 여신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는 얘기다. 공유지에 모인 사람들은 풍요를 기원하고 초목의 영혼을 찬양했다. 로마인들은 플로랄리아 축제를 열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목동이 원형으로 모여 불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 켈트족은 화톳불을 피웠으며 티롤 사람들은 냄비와 팬을 두들기며 연주했다. 숲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화환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의 머리에 씌워주며 “5월에 빠져들었다.” 지은이는 그밖에도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가진 여자들이 마녀로 고발되어 화형당하면서 억압이 시작되었다는 것, 1431년 5월 화형당한 잔 다르크가 재판을 받으며 어린 시절 둘러싸고 놀았던 “5월의 기둥”에 대해 언급한 사실, 메이데이가 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필립보와 야고보 두 성자를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는 점을 밝힌다.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아래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사진은 2004년 뉴욕에서 연 르네상스 축제 한 장면. 갈무리 제공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아래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사진은 2004년 뉴욕에서 연 르네상스 축제 한 장면. 갈무리 제공

이런 촘촘한 5월의 역사를 읽노라면 저항과 순교의 전통을 가진 메이데이가 권력자에게 얼마나 불길하고 불온한 날이었을지, 메이데이를 짓밟아야 했던 그들의 두려움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백인 남성 노동자의 저항이 아니라 인류사를 통틀어 민중 모두가 봉기하고 공유지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만물이 생기를 얻어 소생하는 날로서 재의미화하려는 지은이의 뜻도 뚜렷하게 보인다. 라인보우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번 노동절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행진도, 데모도, 연회도, 혁명적 모임도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공유지야말로 메이데이의 핵심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영감”이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공유지의 회복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바다.

책 말미, 지은이는 인류세가 펼쳐지며 대멸종의 시기도 함께 시작되었다며, 죽기 전 한번 크게 우는 백조의 노래에 빗대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진실한 맹세가 다시 울려 퍼지고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단합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세상이 여기 있고 회복해야 할 지구가 여기 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아래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사진은 메이폴을 둘러싼 현대의 축제. 갈무리 제공
메리마운트에 세운 5월의 기둥 아래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사진은 메이폴을 둘러싼 현대의 축제. 갈무리 제공

30년 가까이 메이데이에 대해 쓴 각각의 글을 모은 것이다보니 책 전반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읽히진 않는다. 하지만 ‘메이폴’의 녹색 가치와 기원을 설명하는 내용이 워낙 강렬하고 근사해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가진 자들의 적의와 도발에 맞서는 이론을 펼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제3세계 지식인, 페미니스트들과 교류하며 쉼없이 생각과 행동을 수정해온 노학자의 겸손한 자세와 치열한 공부까지 행간에서 느낄 수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꽁트] 마지막 변신 1.

[꽁트] 마지막 변신

일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 “조성진이 롤모델…임윤찬은 놀라운 재능” 2.

일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 “조성진이 롤모델…임윤찬은 놀라운 재능”

파벌화·음모론이 낳은 내전…한국 민주주의 위한 ‘예언서’ [.txt] 3.

파벌화·음모론이 낳은 내전…한국 민주주의 위한 ‘예언서’ [.txt]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4.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미학의 마르크스’ 루카치, 소설론 통해 사유의 궤적 좇다 [.txt] 5.

‘미학의 마르크스’ 루카치, 소설론 통해 사유의 궤적 좇다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