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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뭐가 힘드냐굽쇼?

등록 2020-05-08 06:01수정 2020-05-08 12:28

1940년 10월19일치 미국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블랙스톤 자동 세탁기 광고. 뿌리와이파리 제공
1940년 10월19일치 미국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블랙스톤 자동 세탁기 광고. 뿌리와이파리 제공

세탁기의 배신

김덕호 지음/뿌리와이파리·1만8000원

2018년 12월 초 미셸 오바마는 여성이 ‘일가정양립’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한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을 비판하며 눈을 치켜떴다. 결혼은 여전히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했듯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계가 주부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이유가 뭘까? 미국사 연구자인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양학부 교수는 <세탁기의 배신>에서 이 질문의 답을 추적해 들어간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선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남성이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공사영역의 분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보수적 엘리트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들은 여성을 집에 못박아 두려는 기획을 시작했고, 이것이 곧 ‘가정과학’ ‘가정경제학’ 운동으로 이어졌다. 최신 과학이론을 가정에 적용시키자 여성의 일은 무한정 늘어났다. 가정은 ‘과학적 기업’으로 탈바꿈했고 가족 생활 모든 면에 과학과 위생 담론이 적용되었다. 주부는 가족 보건 담당자로서 청결 유지와 질병 예방을 위해 각종 정보를 얻어 제품을 구비해놓고 쓸고 닦고 광내고 끓이고 세탁했다. 1920~30년대 젊은 주부들은 특히 청결에 집착했는데, 이는 기업 이익과 강하게 연관되었다. 비누와 위생 산업이 발전하면서 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세균이 옮지 않는 젖병, 살충제, 붕대, 살균소독제 등이 출시될 때마다 광고를 통해 위생과 청결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동선을 극도로 합리화해 설계한 근대 주택은 주부가 건강하고 행복한 시민을 키워내는 가내공장이었다. 가사일의 효율성을 높일수록 가정에서 쉬지 못하는 이는 주부뿐이었다.

1911년부터 제너럴 일렉트릭사는 ‘전기하인’을 고용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라고 선전했다. “전기를 당신의 하인으로 만들라”는 광고는 깨끗함, 안전함, 편리성을 강조했다. 1920년대 미국에는 최초의 대량소비사회가 도래했고 가전제품의 혁신이 이뤄졌다. 1929년 6월에 이미 미국 전 가구 67%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1920년대 말 거의 모든 가정이 전구와 전기다리미를 갖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세탁소와 가정용 세탁기가 경쟁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192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가정에서조차 상업용 세탁소를 애용했다. 하지만 전기세탁기가 가정에 도입되면서 세탁소에 맡겼던 세탁물이 다시 주부의 손으로 돌아왔다. “현대적 노동절약 기구”라던 세탁기는 주부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은 가정의 위생화, 모성의 과학화를 강조하는 가정과학 운동과 더불어 더 많이, 더 자주, 더 청결하고 위생적인 집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낳았다. 돌아서면 쌓여 있고, 해도 해도 티 안 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집안일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책은 가사기술의 발달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줄지 않았거나 심지어 늘었다는 ‘코완의 패러독스’를 설명하고 돈이 지불되지 않는 여성들의 ‘그림자노동’과 ‘혼일’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젠더는 결국 권력의 문제이고 가사기술의 개발과 발전 또한 젠더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전제품의 등장은 여성해방보다 가사노동 예속화에 기여해왔다는 것이다. 가전제품 생산 기업은 여성을 자유롭게 하고 일자리를 줄 것처럼 광고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가사노동 영역의 섬세한 부분까지 찾아내 끝없이 노동하도록 여성의 뒤통수를 후려친 셈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돌밥’(돌아서면 밥한다)에 시달리던 주부들의 힘겨움이 오버랩되는 책. 전염병 시대 한국의 성공적인 위생과 방역 바탕에는 무엇보다 주부들의 그림자 노동이 깔려 있었다는 점까지 저절로 생각이 이어진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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