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올포트는 입법이 편견을 타파하며 악순환을 깨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지난해 10월17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주최로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연 항의 집회 장면. 장애여성공감 지적장애여성 인권투쟁단 만세팀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 집단에 이질적인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자원이 없고 외양과 취향도 달라 무리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는 게 없어 무지하다고 비난받고, 교육을 받겠다면 욕심이 많다고 질타 당한다. 동화되려고 해도 욕을 먹고, 안 되려고 해도 욕을 먹는다.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가난한 사람, 외국인 등을 향한 이런 끝없는 적대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국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1897~1967)가 쓴 <편견>은 이 질문의 답을 파헤치는 사회심리학의 고전이다.
1954년 초판 출간 뒤 인권과 차별 연구에서 중요 레퍼런스로 쓰여온 이 책이 840쪽짜리 한국어판으로 첫 완역돼 나왔다. 발간 25주년 기념사와 1979년판, 1954년판, 1958년판 머리말까지 4편의 소개글이 앞쪽에 실려 무게감을 더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편견 연구에서 영구불변의 패러다임”이자 “편견 문제의 이정표”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의의는 편견과 차별, 그리고 폭력까지 이어지는 인간사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까지 내놓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올포트는 앎과 지식이 가진 ‘선한 영향력’을 믿고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인간이 가진 적개심의 뿌리를 알면 그 파괴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편견’의 가장 간략한 정의는 “충분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고, 편견의 두가지 기본 요소는 ‘잘못된 일반화’와 ‘적개심’이다. 범주 만들기는 사실 인간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할 수 있고, 그래야 질서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주화는 위험성도 크다. 소문을 믿고 자신의 경험을 잘못 투사하여 망상에 빠지면 비합리적 범주를 쉽게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일말의 진실조차 없을 수 있다”고 올포트는 잘라 말한다. ‘외국인은 무섭다’ ‘여성은 의존적이다’ 등의 편견은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쉽게 수긍해서 발생한다.
‘차별’은 편견보다 더 직접적이고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부정적 행동을 가장 약한 것부터 구분하면 적대적인 말 〈 회피 〈 차별 〈 물리적 공격 〈 절멸(폭력의 최상 단계, 린치 등) 차례다. 올포트는 “독일인들이 유대인 친구와 이웃을 회피하게 된 이유는 히틀러의 적대적인 말 때문이었다”며 “이 섬뜩한 과정의 최종 단계가 아우슈비츠 소각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때론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혐오표현 같은 적대적인 말이 곧바로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책에는 ‘내집단’과 ‘외집단’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편견을 두 집단 차이에 따른 부정적 태도와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내집단’에는 가족, 노동조합, 사적 모임, 도시, 주, 국가 구성원 등이 해당한다. 가족주의가 강한 사회에서 모든 사회 단위는 ‘공동의 적’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깜둥이”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은 공동의 적을 향한 적대적인 말은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졌다. 종교 집단, 민족 집단, 인종 집단은 “만능 희생양”이 되기도 쉽다.
“지배 집단의 면전에서 편견의 피해자들은 자아를 깨끗이 지우려고 노력한다. 주인이 농담을 하면 노예는 웃고, 주인이 사납게 굴면 노예는 움찔하고, 주인이 아부를 원하면 노예는 아첨을 떤다.” 책에서 생존을 위한 피해자의 자기 방어를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비극적인데, 올포트는 “내가 죽을 운명의 무언가를 앞에 두고 웃는다면 그것은 내가 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시인 바이런의 말을 인용한다. 또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이 억압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도 상세히 풀이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신적으로 굴복하고 감시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억압자의 정신세계를 물려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휴머니티를 드러내는 이런 분석이야말로 1950년대에 나온 이 책이 사회심리학의 ‘고전’으로 대접받는 이유를 보여준다.
올포트는 편견을 타파하는 방법으로 접촉, 공동의 목표, 그리고 입법을 강조한다. 사진은 2017년 5월25일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의전화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과 차별적인 군형법 폐지를 주장하며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마녀” “빨갱이” “유대인” 등을 낙인찍는 선동가들이 앞장서면 주변에 있는 ‘중간 계급 자산 소유자’들이 합세한다. ‘굳이 무례하게 굴 이유가 있나? 굳이 사회적 관행에 도전할 필요가 있나?’ 같은 생각을 하며 ‘정중하고 악의 없는’ 부류의 사람들까지 ‘동조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억압자들은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사고방식이 반민주적이라고 여기지도 않는 ‘확신범’들이다. 이들은 ‘해방’ ‘정의’ ‘황금률’ 같은 말들을 멋대로 가져다가 쓴다. ”나는 편견이 없지만…”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같은 말은 자신의 편향성을 벌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을 타파하는 방법으로 지은이는 접촉, 공동의 목표 그리고 입법을 강조한다.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등한 지위에서 접촉할 때 편견은 감소한다. 최고위급 경영진에서 차별 철폐에 앞장서는 것 등 정책을 초반에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저항을 상쇄할 수 있다. 격렬하게 대립하다가도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 사람들은 선거나 입법 결과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인다. “법에는 악순환을 깨는 능력”이 있고, 입법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가장 적절한 차별 철폐의 조치이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한국의 차별금지법을 인권학자, 법학자 들이 가장 강력히 주장하는 까닭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이 책은 편견에 대한 시선을 ‘개인’에서 ‘구조’로 바꾸는 등 역사적 의미가 큰 책”이라며 “올포트의 통찰처럼,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혐오표현으로 편견을 조장하니 이에 고무돼 실제 증오범죄가 유의미하게 늘어났고 영국에서도 브렉시트 이후 증오범죄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유행에 대한 적용도 가능하다. 홍 교수는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편견이 확산되기 쉬운 토양이 있지만, 다행히 방역당국이나 지자체, 언론, 시민사회 등에서 편견의 확산을 경계하는 흐름도 있다”며 “그러나 팬데믹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특정집단을 찍어 공격하는 일부 행태가 방치된다면, 어느 순간 추방이나 폭력 등의 단계로 나아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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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올포트는 혐오발언과 차별이 증오범죄 같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사진은 지난 2월23일 서울 마포구 퀴어 페미니즘 책방에 적힌 혐오 표현 래커칠과 낙서.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