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로버트 맥팔레인 지음, 조은영 옮김/소소의책(2020) 평범한 광복절 연휴를 보냈다. 다음 날도 평온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연휴 다음 날인 18일 저녁에 <정관용의 시사자키>라는 우리 방송 프로그램에서 민주당 대표 후보 토론회를 열었다. 그때까지도 분위기 좋았다. 끝나고 나니 더는 별일 없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회사 최초로 확진자가 나왔고 그 확진자는 후보 토론회를 열었던 바로 그 스튜디오에서 그 전날 아침 방송을 했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어찌나 놀랐던지. 그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했던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을 바람처럼 스쳤던 사람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규방송은 중단되었다. 난생처음 시간대별로 있는 모든 5분 뉴스를 5분 비상 음악으로(그래도 최대한 분위기에 맞게 애절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의 사랑은 잊을 수 없다는 톤으로 선곡해서) 편집해봤다. 40여명 되는 피디, 출연자 들이 보건소나 선별진료소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검사를 받기까지 별의별 해프닝이 다 있었다.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다. 다시 정규방송을 시작한 뒤 “이젠 정상이지요?” “이제 괜찮지요?”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을 못 한다. 올 여름, 우리 곁에 있는 코로나나 기후위기는 상상도 못 한 불길한 일의 씨앗들이 현실 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과연 진짜로 일깨워졌을까? ‘(미디어의)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업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등등등을 이야기한다.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존 버거는 말했었다. 세상을 떠난 존 버거가 하늘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쓴 것 같다. 우리가 재발을 막기 위해 머리를 가장 많이 쓴 것은 인간의 ‘침’ 문제였다. 온갖 논의 끝에 우리는 모든 스튜디오에 투명 아크릴판을 설치했다. 하지만 그것이 코로나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을 막는 ‘본질적인’ 해결책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이제 정상이지요?” “이제 괜찮지요?”라는 말에 대답을 못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언더랜드>의 저자 로버트 맥팔레인은 그린란드에서 몇 주를 보내며 점점 얇아지는 얼음 위에서 이런 글을 썼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에는 ‘미케네의 망루’로 알려진 부분이 있다. 먼 지평선을 지켜보다가 트로이가 함락되었음을 알리는 화톳불이 보이는 즉시 고함을 지르는 일을 맡은 망루지기에 관한 이야기다. 오랜 감시 끝에 마침내 망루지기는 지평선 멀리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 버려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유명한 이미지에서, 망루지기는 ‘커다란 황소가 혓바닥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 인류세를 표현할 때 나는 마치 혀에 황소가 서 있어 경고를 외치지 못하고 위험을 더욱 가까이 끌어들인 망루지기가 된 기분이 든다. (…) 아마도 인류세는 상실의 시대로 가장 잘 표현될 것이다. 종의 상실, 장소의 상실, 사람의 상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해 슬픔의 언어, 그리고 더욱더 찾기 어려운 희망의 언어를 찾는다.’ 이것이 우리가 망설임과 말더듬을 뚫고 찾아내야 할 말이다. 우리는 감염병의 본질에 대해서, 인간과 자연의 파괴적인 관계에 대해서, 종의 상실에 대해서, 미래의 상실에 대해서, 후회와 희망에 대해서 온갖 방식으로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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