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일러스트 장선환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민음사(2019)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담아낸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 가운데 유일하게 국내에 번역 출간된 <가을>은 7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노인 대니얼과 소녀 엘리자베스가 ‘평생을 기다려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다. 출간과 동시에 국내외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애정을 받았고, 맨부커상 최종후보작에 오르며 문학성까지 두루 인정받은 소설을 굳이 여기에 또 소개할 이유가 있을까? 정치적인 세태소설로도 예술과 역사에 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가을>은 무엇보다 잊혔거나 오해받은 여성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폴린 보티는 소설 속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엘리자베스가 복원해내는 영국 최초의 여성 팝아티스트이다. 1960년대 보티와 교류했던(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대니얼은 80대 노인이 되어 만난 이웃집 소녀이자 친구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목격했던 보티의 여러 그림을 세세히 ‘말로’ 들려준다. 20년이 흐르고 미술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된 엘리자베스는 미술품 가게에서 우연히 폴린 보티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발견한다. 오래된 빨간색 양장본 카탈로그에는 어렸을 때 대니얼에게 전해 ‘들은’ 보티의 그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 여성 팝아티스트는 전무하다고 일축하는 지도교수와 언쟁을 벌여가며 폴린 보티를 논문 주제로 삼는다. ‘섹스 심벌’ ‘금발미녀’ 브리지트 바르도를 꼭 닮은 외모 때문에 ‘윔블던의 바르도’로 불렸던 폴린 보티. 이십 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폴린 보티. 이 극단적인 화제성 수식어 사이에서 폴린 보티는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며 살아갔는지, 앨리 스미스는 엘리자베스의 연구와 대니얼의 기억을 통해 복원해낸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폴린 보티는 1963년 영국 정치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성추문의 주역 크리스틴 킬러를 <스캔들 63>이라는 작품에 등장시킨다. 이때 킬러의 모습은 유명한 ‘나체로 의자에 거꾸로 앉은 사진’의 조금 다른 버전이다. 자세는 비슷하지만 표정이 다르다. 소설 속에서 보티는 말한다. “생각하는 킬러를 그려야겠어. 생각하는 사람 킬러.” 우리가 새롭게 만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대니얼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 아나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아나는 대니얼의 기억에만 등장하며 소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만, 어쩌면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대니얼은 ‘저렇게 미치고 저렇게 용감하고 저렇게 영리하고 저렇게 무모하고 저렇게 침착한’ 사람인 여동생이 ‘자라면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중요한 사상가가, 변혁가가, 괄목한 만한 존재가 될 것임을’ 확신하지만, 세상은 그런 대니얼의 생각과 상관없이 무심하고도 잔혹하게 굴러간다. 아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심지어 몇 살까지 살았는지 우리는-그리고 대니얼도-모른다. 다만 작가는 아나가 독일군의 트럭 뒤에 실려 유대인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을 통해 위기와 비참한 순간에도 아나가 얼마나 우아하게 저항하는지를 짧게 보여준다. “무시되고 소실됐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 재발견되고 다시 무시되고 소실됐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 다시 재발견되고, 또다시 무시되고 소실됐다가 재발견되는 것의 무한한 연속.” 소설 속의 이 문장은 앨리 스미스가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이유로 읽힌다. 나아가 우리가 책을 읽는 중요한 이유로도 보인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기록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기억한다. 기억과 기록과 기억의 연쇄작용에서 사람이, 나아가 역사가 발굴되고 복원된다. 대니얼의 말처럼 ‘그게 기억의 유일한 책임’이므로.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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