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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미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등록 2020-10-30 04:59수정 2020-10-30 09:33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게리 폴 나브한 지음, 강경이 옮김/아카이브(2010)

나는 지난 26일 CBS 가을 개편으로 새로운 저녁 시사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준 업, 기분 업, 기운 업’ <김종대의 뉴스업>이란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담당피디인 내가 어찌나 헤매고 있는지 퇴근길마다 기분 다운, 기운 다운이 돼 <김종대의 뉴스다운>을 제작 중인가 싶다. 이미 고도로 미디어화된 세상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까?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언어 증폭기이고 나의 고민은 이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더 많이 해야 할까?’ 내가 꼽은 미래에 틀림없이 중요해질 언어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우울, 두 번째는 인간관계, 세 번째는 식량. 세 문제 다 그렇지만 특히 식량문제는 기후위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책은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탈린은 200만 점이 넘는 회화와 보석, 조각이 있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미술품들을 비밀스러운 장소들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마음에 둔 것은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미술품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 에르미타시 박물관 옆 다른 박물관. 스탈린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박물관. 바로 종자연구소였다. 종자연구소에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가 1894년부터 모은 38만 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가 보관되어 있었다. 열다섯 나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탐험가이자 식량학자인 바빌로프는 115회의 해외원정을 통해 종자를 모았는데, 그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이끈 힘은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젊은 날의 꿈이었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말년은 슬픔 없이는 들을 수가 없다. 그는 정치범으로 몰렸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세상의 온갖 종자를 모았던 향기로운 식물학자는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연구소를 지킨 것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종자 컬렉션에서는 쌀 한톨 사라지지 않았다. 책상에 앉은 채 죽은 그들 옆에는 땅콩, 귀리, 완두콩 표본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종자들이 러시아를 다시 살리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도 바빌로프 동료들이 목숨 걸고 지킨 종자에서 유래된 음식들을 먹고 있다.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앤 드루얀은 “우리에게도 미래가 그토록 손에 잡힐 듯하고 귀중한 현실로 느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로 이들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앞으로 많은 것들이, 우리가 미래의 사람들(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 포함)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의 능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내게는 미래 세대들이 스튜디오에 앉아 식량문제를 주제로 무거운 토론을 하는 것이 현실처럼 보인다. 나도 바빌로프와 동료들처럼 미래를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고 싶다. (목숨까지 걸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란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테니 많이 청취해 달라! (지금까지 송출된 것은 절대 듣지 말고! 채널 98.1. 매일 저녁 6시25분부터…)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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