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이란 무엇인가
이마누엘 칸트 외 지음, 임홍배 옮김/도서출판 길·2만5000원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18세기 유럽 지식계를 뒤흔든 가장 첨예한 문제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는 18세기 후반 독일에서도 담론의 꽃을 피웠다. 독문학자 임홍배 서울대 교수가 옮긴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이 시기에 프로이센에서 발화한 계몽 담론들을 시대 흐름에 맞춰 엮은 책이다. 계몽을 정의하는 글들을 앞에 세우고, 계몽의 사회적 실천에 필수적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글들, 계몽 담론이 프랑스혁명(1789)을 거치면서 사회혁명과 연계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글들을 배치했다. 계몽에 관한 온건한 담론과 급진적 담론을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당대 계몽 담론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필자는 14명에 이르지만, 주인공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독일 계몽주의의 정점이라 할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이 책은 칸트의 계몽에 관한 글을 중심에 두고 그 글이 쓰인 맥락과 그 글이 남긴 영향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독일 계몽운동의 산실 노릇을 한 것은 1783년부터 1796년까지 발행된 <베를린 월간 학보>다. 이 잡지의 발행을 이끈 것이 ‘계몽의 벗들’이라는 독일 계몽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는데 당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의 신임을 받는 관료와 학자들이 이 모임을 주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군주’를 자임하고 사상의 자유를 비교적 넓게 허용하면서 계몽 담론 확산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런 사실에서 이 잡지의 기조가 ‘하향식 계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잡지가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논의 테이블에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은 ‘성직자들의 혼례 성사’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기고자 가운데 한 사람이 교회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은 허례허식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른 기고자가 나서서 교회가 결혼을 주관해야만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두 사람이 모두 ‘계몽’의 이름으로 주장을 폈다는 사실이다. ‘계몽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하지 않고는 논의가 나아가기 어렵게 된 것이다.
독일 계몽주의의 정점인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인 것이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베를린 월간 학보> 1784년 12월호에 실린 이 글에서 칸트는 잡지 주도자들의 계몽관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편다. 칸트의 글은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계몽을 규정하면서 칸트는 미성년 상태의 원인을 ‘스스로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의 결핍’에서 찾는다. 이어 저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대로 계몽이란 본질상 ‘자기계몽’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보는 칸트의 사상이 ‘계몽’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칸트가 이런 주장을 할 때 그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것은 ‘종교적 차원의 계몽’이었다. 칸트는 당대 종교가 완고한 교리체계로 신자들을 미성년 상태에 가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직자가 신자들의 양심과 믿음의 문제를 신자들을 대신해 해결해주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내 양심을 판단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미성년 상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국가와 교회는 신자들이 스스로 양심을 지키는 성년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는다. 성직자들은 “그들이 돌보는 가축을 어리석게 만들고, 이 온순한 피조물들이 그들을 가두어 놓은 보행기 바깥으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주도면밀하게 단속한다.” 이렇게 족쇄를 채워놓고 스스로 걷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범죄”라고 칸트는 단언한다. 칸트가 말하는 ‘용기’는 바로 이 정신의 족쇄를 시민들이 스스로 깨뜨릴 용기를 가리킨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계몽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강조한다. 여기서 칸트가 구분하는 것이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이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 자기 직분 안에서 그 직분이 요구하는 대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학자의 입장에서 독서계의 모든 공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 ‘도구적 이성’을 가리킨다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공공적 이성’을 가리킨다. 칸트가 <베를린 월간 학보>에 계몽에 관해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스스로 계몽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이때 필요한 것이 ‘자유’ 곧 사상을 표현할 자유다. “자유를 허용하기만 하면 공중은 거의 틀림없이 스스로를 계몽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옹호자로서 칸트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칸트의 계몽 담론은 이후 여러 문필가들의 발언을 통해 변형되고 진화한다. 그런 사실을 칸트 철학의 후계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가 1793년에 쓴 글(‘유럽 군주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회복할 것을 촉구함’)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히테는 칸트보다 훨씬 더 강경하고 단호한 어조로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그 어떤 권력도 제한할 수 없는 권리이며 검열에 맞서 진리 탐구에 매진하는 것이 계몽의 과제임’을 역설한다. 이어 1795년 요한 베냐민 에르하르트는 자유를 넘어 혁명이 민중의 권리임을 주장한다. “민중의 혁명이란 민중의 힘으로 성년의 권리, 즉 자립적 주체의 권리를 확보하고 귀족과 민중의 법적인 주종관계를 철폐하려는 시도다.” “만약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려는 것을 누군가 방해한다면 거기에 맞서 봉기할 권리가 있고, 만약 그런 방해가 체제에 기인한다면 그 체제를 철폐할 권리가 있다.” 에르하르트의 이런 발언에서 급진화한 칸트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지 않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