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전 손택 지음, 배정희 옮김/이후(2007)
루이스 캐럴이 옥스퍼드 재직 시절 크라이스트 칼리지 학장의 둘째 딸 앨리스 리델을 모델로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 ‘꿈의 아이’를 창조했던 1862년, 미국 땅에는 또 다른 앨리스가 10대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다. 앨리스 제임스(1848~1892)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와 미국 문학의 거장이자 <여인의 초상>의 작가 헨리 제임스의 여동생이다. 앨리스는 열아홉 살에 발발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평생 병상에 갇혀 지내다가 마흔넷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천재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불운한 외동딸로 생을 마감한 앨리스는 사후 40년이 흐른 뒤 말년에 병상에서 쓴 일기가 출간되면서 ‘일기작가’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사후 90여 년이 흐른 1980년에는 <앨리스 제임스 전기>가 출간되면서 짧았던 생이 비로소 입체적으로 조명된다. 전기작가 진 스트라우스는 이 책으로 미국의 우수한 역사 저작물에 수여하는 뱅크로프트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91년, 미국의 대표 지성 수전 손택은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최초의 희곡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을 발표한다.
총 8개 장으로 이루어진 희곡은 10층 정도 쌓인 매트리스 밑에 깔린 앨리스의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시작된다.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 꼼짝달싹 못 하는 앨리스를 간호사는 ‘게으름뱅이 씨’라고 부른다. 장이 바뀌는 동안 앨리스는 20년 전 아빠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기도 하고(“아빠, 나, 자살해도 되나요?”) 오빠 해리(헨리 제임스)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희곡의 압권은 단연 5장으로 손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유명한 ‘모자 장수의 차모임’ 장면을 빌려온다. 앨리스 제임스의 차모임에 초대받은 사람은 19세기 두 여성 작가 에밀리 디킨슨과 마거릿 풀러다. 에밀리 디킨슨은 뛰어난 재능과 뜨거운 열정을 품었으면서 스스로 은둔의 삶을 선택했고, 죽음과 영혼을 주제로 무려 1775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 발표한 시는 극히 적었다. 마거릿 풀러는 <19세기 여성>이라는 저명한 초기 페미니즘 저서를 집필한 작가이자 평론가, 개혁주의자였지만, 불의의 해상 사고로 가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손택은 차모임에 허구의 인물도 초대한다. 발레극 <지젤>에 등장하는 결혼식 전날 죽은 젊은 여성들의 유령,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 나오는 분노에 찬 여인이자 수면증을 앓는 ‘쿤드리’다. 손택은 이 네 여성을 앨리스 옆에 불러모으고 저마다의 이야기로 한 영혼을 어루만지게 한다. 초판 서문에서 손택은 ‘이 책은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들과 여성들의 어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자의식에 관한 희곡이다’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러한 의도를 가장 본격적으로 드러낸 장이 5장이다.
손택의 희곡을 통해 우리는 ‘천재 오빠들을 둔 불운한 여동생’이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과 독창성, 공격성을 어찌할 줄 몰라 인생을 파괴했던’ 19세기의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여성이었지만(그는 오빠들과 달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극단적인 자의식을 갖추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끝까지 탐구했으며 자신의 질병을 하나의 ‘문학적 주제’로 바라보고 치열하게 기록한 작가였다. 이제 우리가 아는 앨리스가 한 명 더 늘어났다. 앎은 사랑의 시초이므로 우리가 사랑할 앨리스가 하나 더 생겼다는 뜻이리라. 더불어 우리가 끝내 발견하고 제대로 알아봐야 할 앨리스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당연한 말도 덧붙이고 싶다.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
일러스트 장선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