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그린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역할을 맡은 배우 강하늘(왼쪽)과 동주의 사촌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의 모습. 영화에서는 몽규가 동주에게 백석 시집 <사슴>을 권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
김응교 지음/아카넷·1만8000원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잼’과 도연명과 ‘라이넬·마리아·릴케’가 그러하듯이”(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마지막 부분)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마지막 부분)
백석과 윤동주의 잘 알려진 두 시는 이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를 알려주는 증거로 꼽힌다. 그들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서구의 시인들 이름이 나란히 들어 있다는 점에서 증거는 유력해 보인다. 백석의 시는 <문장> 1941년 4월호에 실렸고 윤동주의 시는 같은 해 11월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1936) 전체를 원고지에 정성껏 필사하고 표지까지 손수 그려 책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표지 아랫부분에는 1937년 8월5일이라고 날짜를 적어 놓았다. <사슴>은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었기에 책을 직접 구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필사본을 보관해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석은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윤동주가 필사한 백석 시집 <사슴> 중 ‘모닥불’ 부분. 말미에 “걸작이다”라는 평가가 붉은 색연필 글씨로 쓰여 있다. 윤동주기념사업회 제공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쓴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는 백석과 윤동주의 영향 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앞서 두 권의 윤동주 연구서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와 <나무가 있다-윤동주 산문의 숲에서>를 낸 김 교수의 세 번째 윤동주 관련서다. 윤동주의 <사슴> 필사본을 중심으로, “동주가 백석에게서 배운 부분, 인유(引喩)한 부분을 대상으로” 삼았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이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덜구에 천상수(天上水)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백석, ‘초동일(初冬日)’ 전문)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엔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거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윤동주, ‘굴뚝’ 전문)
<사슴>에 들어 있는 시 ‘초동일’이 동주의 동시 ‘굴뚝’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고 김응교 교수는 본다. 필사본 시집 <사슴>에서 “아이들이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는 구절에는 밑줄이 쳐져 있고 “그림 같다”는 짧은 평이 곁들여져 있다. 백석 시에 나오는 무감자는 고구마를 가리키지만, 윤동주의 시에서는 그것이 감자로 바뀌었을 뿐 아이들이 감자(또는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장면은 동일하다.
“아침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백석, ‘추일산조’ 첫 연)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윤동주, ‘산울림’ 전문)
<사슴> 필사본에서 윤동주는 ‘추일산조’ 첫 연의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에 밑줄을 긋고 “좋은 구절”이라고 붉은 색연필로 썼다. 꿩과 산울림의 장난이 동주의 시 ‘산울림’에서는 까치와 산울림의 장난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판단이다. 또 “별 많은 밤/ 하늬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백석, ‘청시(靑枾)’ 전문)에서 보이는 우주적 상상력은 동주의 시 ‘별 헤는 밤’으로 이어진다고 김 교수는 본다.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흰색의 비교도 흥미롭다.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아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백석, ‘흰 밤’ 전문)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윤동주, ‘슬픈 족속’ 전문)
흰 색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백석의 시들에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흰색들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김 교수는 쓴다. 비슷한 맥락에서 ‘슬픈 족속’은 “네 가지 흰색 사물을 절취하여 한민족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백석과 동주의 영향 관계는 개별 시구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백석의 시를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 모두 아동문학에 관심을 지녔으며, 한반도 이외에 만주와 일본에서 지내면서 디아스포라 또는 난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그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 ‘눈’, ‘호주머니’를 통해 두 시인이 주변인을 표현하는 양상을 비교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흰 바람벽이 있어’와 ‘별 헤는 밤’이 각각 흰 바람벽과 밤하늘을 스크린 삼아 삶을 노래한다는 점, 윤동주의 ‘서시’ 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傀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의 번역이라면 백석의 시 ‘귀농’,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는 도연명 시 ‘귀거래사’의 전원정신이 엿보인다는 사실 등을 김 교수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