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 구구문고 네 번째
지하련 지음/발코니출판사(2020)
순재는 남편과 ‘만나는’ 사이였던 친구 연희와 나란히 산길을 걷는다. “날 비난하시려면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제 내게도 할 말이 있다면 그분을 사랑했다는 것, 그 사랑 앞에서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한 남자를 향한 각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지금 감정이 어떠한지 놀랍게도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눈다. 순재는 연희가 ‘어디까지나 자신을 신뢰하는 대담한 여자’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순재는 남편의 뻔뻔한 태도에 경악한다. ‘너무도 이기적이라 그 정도를 넘는’ 남편의 말이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며 좀 전에 헤어진 연희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역시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다.’(‘산길’)
아내와 사별한 석재는 아내와 제일 친했던 동무이자 결혼과 이혼, 복잡한 ‘연애 관계’로 악명 높은 소문의 주인공 정예에게서 만나자는 편지를 받고 불쾌감과 그 뒤에 오는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 오랜만에 만난 정예는 헤어지기 직전 석재에게 고백처럼 말한다. “죽기 전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제일 고약하고 흉한 나의 이야기를 단 한 사람 앞에서만 하고 싶었어요.” 정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석재였을까, 아니면 석재의 아내였을까. 작가는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석재는 비굴한 자신과 대조되는 정예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후회하지 않는 얼굴, 싸늘한 밝은 눈으로 행위했고, 그 눈으로 내 일을 피하지 않는 얼굴.’(‘가을’)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어딘가 불편한 형예는 막 혼인을 치른 친구 정희의 집에 초대받는다. 정희는 자신의 신랑을 소개하고 그동안의 연애 이야기, 결혼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형예는 마음이 뒤숭숭하다. ‘학교를 졸업하던 해, 정희와 도망갈 약속을 어겼던 일, 별로 마음이 내키지도 않는 것을 어머니가 몇 번 타이른다고 그냥 시집갈 궁리를 하던 일 등 생각하면 아무리 자기가 한 일이라도 모두 지랄 같다.’ 집에 돌아온 형예는 남편의 태도에 비위가 상하고 ‘드디어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결별’)
요양차 친정에 온 삼희는 ‘불행한 일 때문에 등을 다치고’ 산 밑에서 나무와 가축을 기르며 호젓한 삶을 살아가는 오라버니 집에 머문다. 오라버니는 ‘생명과 육체와 훌륭한 사나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태일 군과 교우하지만, 삼희는 오라버니가 두둔하는 ‘사나이의 세계’가 영 마땅치 않다. 오라버니는 태일 군과 자신이 어린애 같다는 삼희의 말에 ‘어린애라는 뜻은 지극히 넓고 완전히 풍족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일 수 있으며 이런 건 ‘너희들 그 부족한 창조물들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외양과 성정은 ‘사나이의 세계’보다는 ‘부족한 창조물’ 쪽에 더 가깝다. 삼희는 ‘자기 약점을 남에게서 발견하고 분노한다는 건, 너무 부도덕하지 않은가?’라는 말로 오라버니의 복잡한 여성혐오이자 자기혐오를 간파한다.(‘체향초’)
지하련(1912~?)은 총 7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1940년대에 쓴 그의 소설에는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과 심리, 다층적인 관계, 다각도의 시선이 담겼다. 어떤 여성도 쉽게 도구화나 대상화되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 심리는 지극히 ‘현대적’이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수준의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대답은 ‘체향초’에서 찾을 수 있다. 삼희는 기차에서 우연히 목격한, 무능한 제 아비를 거칠게 다그치는 젊은 여자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저렇게 똑똑하게 되기까지 그 마음이 얼마나 다쳤을까.’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