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문학동네·1만4500원
심윤경의 소설 <영원한 유산>은 작가가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다. 청와대 옆 인왕산 자락 산동네에서 찍은 이 사진의 배경에는 이색적인 건물 하나가 보인다. 1917년 친일파 윤덕영이 세웠던 유럽풍 대저택으로, 윤덕영의 호를 따 벽수산장으로 불렸으며 1966년 화재가 난 뒤 방치됐다가 1973년에 철거되어 사라졌다.
화재가 나기 전까지 이 건물은 ‘언커크’라는 약칭으로 불린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사무실로 쓰였다. 소설은 언커크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애커넌의 통역 비서로 일하는 청년 이해동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사기 혐의로 복역하던 윤덕영의 딸 윤원섭이 출소 뒤 언커크를 찾아온다. 어린 시절 이 건물에서 지냈던 기억과 그만이 알고 있는 건물 안 비밀 공간에 얽힌 이야기로 애커넌을 휘어잡은 그는 급기야 ‘문화 복원 디렉터’라는 직함을 얻어 건물과 함께 친일파인 제 아버지를 미화하는 일에 나선다.
작가 심윤경이 자신의 등단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배경이기도 한 서울 인왕산 자락 산동네에서 어릴적 찍은 사진. 왼쪽 위로 보이는 유럽풍 건물이 친일파 윤덕영이 세운 벽수산장이다. 문학동네 제공
벽수산장이 언커크 사무실로 쓰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해동과 애커넌, 윤원섭은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로 알려진 윤덕영이 이 건물을 지은 것은 한일병합의 공으로 일본 왕한테서 받은 엄청난 은사금 덕분이었다. 해방 뒤 이 건물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친일의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이 건물을 윤원섭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운 문화 유산으로 기리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제 아비 윤덕영 역시 터무니없이 재평가하려 든다.
“벽수산장은 시대에 굴하지 않았던 한 인물의 집념이 낳은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윤덕영 자작은 한일합방의 엄혹한 현실 속에 찌들어 있던 조선 청년들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앞세울 것이 꼭 필요하다 여겼다. (…) 그것(벽수산장)은 그가 전 재산을 일으켜 민족의 제단에 바친 공물, 지극한 사랑과 존숭이었다.”
윤원섭이 작성한 팸플릿에서 벽수산장은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인 문화유산으로 떠받들어진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해동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궤변이다. 벽수산장을 적산으로 간주하는 해동의 관점과 그것을 유산으로 평가하는 윤원섭의 관점이 소설 전편에 걸쳐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벽수산장이 건물로서 내뿜는 아름다움은 사태를 한결 혼란스럽게 만든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 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친일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과 고민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가운데, 윤원섭이라는 캐릭터가 특히 흥미로운 소설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