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탓에 통째로 소거된 듯한 2020년. 그래도 우리는 살아갔고 사랑했고 슬퍼했고 분노했다. 사회 부조리와 모순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며, 굳어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끊임없이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스로 한 걸음을 나아갔다. <한겨레> ‘책&생각’은 2020년과 작별하며 ‘올해의 책’을 국내서와 번역서 각 10권씩 꼽았다. ‘책&생각’ 필진와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책지성팀이 선정했다. 추천작 전체는 <한겨레> 누리집 ‘책&생각’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책 순서는 가나다순)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와이즈베리·1만8000원
‘정의’에 대해 묻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질문을 더 뾰족하게 가다듬었다.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이 질문이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찔렀는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절망을 주는 방식으로 쌍방향 폭정을 저지르며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또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며,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체제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샌델은 트럼프가 아니라 민주당을 비판한다. 트럼프의 당선은 패자의 절망과 모욕감을 정확히 읽어낸 “합당한 결과”이며, 민주당은 이 점을 놓쳤다는 것이다. 교육·정치·종교·철학을 넘나드는 유려한 논증이 여러 생각 거리를 건넨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민족
아자 가트·알렉산더 야콥슨 지음, 유나영 옮김/교유서가·3만2000원
민족과 민족주의가 언제 탄생했느냐는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다. 민족이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이라는 ‘전통주의’ 시각은 민족이 정치적·경제적 근대화의 산물이었다는 ‘근대주의’ 시각의 공격을 받고 역사의 퇴물 취급을 받았다. 아자 가트와 알렉산더 야콥슨이 쓴 <민족>은 근대주의에 대한 전통주의 반격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저작이다. 이 책은 인류사 전체를 아우르며 민족이라는 실체가 형성돼 변모해 온 과정을 거시적 관점에서 상술한다. 특히 근대주의 역사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민족’은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의 초기 단계에 이미 형성돼 정치적으로 커다란 힘을 발휘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8500원
‘젠더 데이터 공백’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보이지 않는 차별을 가시화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남성을 ‘기본값’(디폴트)으로 설정하면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데이터 공백’이 발생하며, 이는 여성에게 적게는 불이익, 심하면 생명의 위협까지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자동차 충돌시험에서 주로 177㎝, 76㎏인 표준 남성 체격의 인형(더미)을 사용하는데, 여성은 이보다 작고 가볍기 때문에 실제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남성보다 더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 중립적으로 ‘보이는’ 매끈한 제도 속에서 차별을 느낄 때 읽으면 흐릿하던 차별의 실체가 마치 새로 맞춘 안경을 쓴 것처럼 한결 또렷하게 다가올 것이다.
최윤아 기자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문학동네·1만5500원
‘극우의 예언가’로 불리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최신작. 2018년 11월 노동자들이 벌인 유혈 시위 ‘노란 조끼 운동’을 예언했다고 해서 또 다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인 사십대 중반 남성 플로랑은 노르망디에서 목축을 하는 농업대학 동창 에메릭을 찾아간다. 유럽연합의 우유 쿼터제 포기로 타격을 입은 에메릭은 아내마저 떠나자 유혈 시위를 벌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소설의 다른 한 축은 항우울제 복용으로 성기능 장애를 겪는 플로랑이 과거에 사귀었던 여성들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 그의 성생활 흥망사다. 타인과 외부 세계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와 혐오로 일관하는 지극히 우엘벡적인 인물 플로랑의 독설을 접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한길사·1만6500원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폴리 4부작’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가 그로부터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로 이루어진 나폴리 4부작이 서민층 주거 지역인 ‘아랫동네’의 두 소녀 레누와 릴라의 60여 년에 걸친 우정과 갈등의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중산층 거주지 ‘윗동네’의 십대 소녀 조반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책 표지에 묘사된 바, 식탁 밑에서 몰래 뒤엉킨 아빠 친구와 엄마의 다리는 조반나로 하여금 환멸과 반항을 거쳐 각성과 성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가 된다. ‘나폴리 4부작’의 주요 인물을 연상시키는 빅토리아 고모를 비롯해, 전작과 비교해 가며 읽을 만한 포인트들도 여럿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바다출판사·1만7800원
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의 산문집이다. 1951년 시집 <세상 바꾸기>를 펴내고 데뷔한 그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등 여성 인권,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1966년부터 2006년까지 쓴 산문을 모은 이 책에는 시를 쓰면서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과 주목받지 못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세운 레즈비언 페미니즘 이론 등을 담았다. 문학과 페미니즘을 삶의 중심에 두고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어를, 나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나섰던 그의 발자취를 읽을 수 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브라만 좌파―상인 우파’ 불평등체제 혁파하라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문학동네·3만8000원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21세기 자본>으로 세계 경제학계의 총아로 떠오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최근작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시야를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으로 확대해 경제적 불평등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에 주목한다. 이와 함께 이 책은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정치적 연합을 불평등 구조가 공고해지는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커지는 데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정치에서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 체제가 가동됐다는 것이다. 전작에서 경제적 불평등의 지속적 심화를 실증했던 지은이는 이번 책에서 극단적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는 방안으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라는 더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이지선 옮김/너머북스·2만4000원
코로나19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뭘까.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감염병 추적 연구를 한 진화생물학자 롭 월러스는 “거대 농축산업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감염병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거대 농축산기업이 농장을 지으려고 숲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숨은 병원균이 세상 밖으로 나와, 농축산기업의 유통망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그는 단순히 백신 개발로 팬데믹을 잠재우는 일시적 방법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근간을 바꾸는 장기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구조적 원헬스’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과 동물, 생태계의 공존을 추구하는 ‘원헬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문제, 생태계를 위협하는 사회문화 인프라 등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허윤희 기자
편견
고든 올포트 지음, 석기용 옮김/교양인·3만6000원
<편견>은 1954년 초판이 출간된 사회심리학의 고전이다. 한국어판으로는 올해 처음으로 완역됐다. 이 책은 인간이 가진 ‘편견’을 파헤친다. 편견의 두 가지 기본 요소는 ‘잘못된 일반화’와 ‘적개심’이다. 편견은 차별로 현실화한다.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 여성을 향한 2차 가해, 거대 권력에 맞선 이들에게 쏟아지는 비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등을 보라. 책에서 생존을 위한 피해자의 자기 방어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비극적이다. “내가 죽을 운명의 무언가를 앞에 두고 웃는다면 그것은 내가 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바이런의 시구가 인용된다. 해법은? “악순환을 깨는 능력”이 있는 입법을, 지은이는 강조한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다.
김진철 기자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에이도스·2만5000원
‘향모’(윙가슈크)는 아로마 허브의 일종으로 머리를 땋듯 땋아 선물이나 제의에 쓴다. 이 향모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게 “어머니 대지님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다. 어머니 대지님 외에도 안개, 개울, 물고기, 곡물, 나무, 독수리, 달님 등이 부족들에겐 감사의 대상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의 식물학자인 로빈 월 키머러는 이런 토착적 세계관에 과학적 훈련을 보태 새 지식을 창출해낸다. 이 책은 과학서이면서 신화, 역사, 문화가 등장하고 경제서이기도 하다. 아우르자면 생태·영성·철학으로 가득한 에세이다. 인류의 영성을 복원해 기후위기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세상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저자의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진철 기자
<한겨레> ‘책&생각’이 ‘올해의 책’을 선정하며, 가장 아쉬웠던 작품은 두 편이다. 고공농성 노동자에서 시작해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를 담아낸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창비), 구순의 어머니를 돌아가시기 전까지 간병하며 적어나간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이다. 올해 유독 창비에서 좋은 책이 많이 나왔지만 출판사 편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등, 봄날의책) <죽은 자의 집 청소>(김영사)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강성현, 푸른역사) <진리의 발견>(마리아 포포바, 다른) <타인에 대한 연민>(마사 누스바움, RHK) <팬데믹 패닉>(슬라보예 지젝, 북하우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호프 자런, 김영사) <정치적 부족주의>(에이미 추아, 부키)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주디스 버틀러, 창비)도 아깝게 선정되지 못했다. ‘전태일 공동 프로젝트’로 출간된 책 10권 중 한 권만 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역사에 남을 위대한 기획이었음을 여기 기록해둔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올해의 책’ 추천 전문가들>(가나다 순)
강민혁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박현주 작가 번역가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서영인 문학평론가
양경언 문학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다혜 <씨네21> 기자, 작가
이주혜 소설가
이현우 서평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정미경 소설가
정여울 작가
정인경 과학저술가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표정훈 출판평론가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