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일러스트 장선환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아작(2018) 시간 여행 기술 ‘네트’가 존재하는 2054년, 옥스퍼드의 역사학도 키브린은 14세기 중세를 연구하러 떠난다. ‘위험등급 10’의 중세로 어린 여학생 혼자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지도 교수 던워디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하’를 담당한 네트 기술자 바드리가 ‘뭔가 잘못됐다’라는 말을 남긴 채 고열로 쓰러지고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퍼지면서 옥스퍼드 전체가 셧다운 된다. 이후 소설 속 옥스퍼드의 모습은 코로나19 상황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격리를 거부하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네트를 통해 과거에서 왔다는 ‘가짜뉴스’가 퍼지는가 하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사람들이 있다. 한편 키브린은 애초 계획에서 28년이나 지난 흑사병이 창궐하는 중세에 떨어진다. 강하하자마자 고열로 쓰러진 키브린을 중세 사람들이 보살펴 살려낸다. 정신을 차린 키브린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강하 지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하지만, 자신을 보살펴준 중세 사람들이 하나둘 흑사병으로 쓰러지자 현대로 돌아가는 길도 포기하고 헌신적으로 주변인들을 보살핀다. 소설은 인플루엔자와 싸우는 21세기의 옥스퍼드와 흑사병과 싸우는 14세기의 옥스퍼드를 번갈아 보여준다. 양쪽 모두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재앙은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에 불과한지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흐름을 기어이 앞으로 끌고 가는 힘 역시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에서 비롯됨을 처절히 드러낸다. 현대의 던워디 교수는 수제자 키브린을 중세에서 구해오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 자신을 ‘외아들을 세상에 보냈지만 동조 작업을 잘못했든지 아니면 누군가 네트를 꺼버렸기 때문에 예수를 데려올 수 없었’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던워디에게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 예수는 바로 키브린이다. 중세의 키브린 곁에는 로슈 신부가 있다. 그는 초라한 외모에 가난한 문맹자라 라틴어 기도문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독실한 신심을 품고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고백 성사를 들어주고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만종을 울린다. 던워디에게 키브린이 예수였다면 로슈 신부에게 키브린은 하늘에서 보내준 캐서린 성녀다. 결국 흑사병에 걸려 죽어가는 로슈 신부는 마지막 순간 키브린에게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조차 사람을 죽음에서 구할 수 없지만, ‘성녀님’은 자신을 구했다고 고백한다. 바로 두려움으로부터, 불신으로부터. 고열로 쓰러진 키브린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살려낸 사람이 로슈 신부라면 고결한 선택과 용감한 행동으로 로슈 신부를 불신으로부터 구원한 사람은 키브린이다. 네트의 오류가 낳은 우연한 불운의 한복판에서 이 시공간 역시 끝내 통과해야 할 삶의 한 면모임을 키브린은 알았다. 재앙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인과 악인을 두드러지게 구별해 보여준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켰던 흑사병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역사학도 키브린은 자신이 떨어진 중세의 사람들을 최후의 한 명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따위 숫자 놀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통계의 이면에서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서로를 구할 때 비로소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원 서사의 주인공이자, 시간 여행의 주체, 용기로 세상을 구한 영웅, 하늘이 보낸 구세주로 설정된 인물이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은 <둠즈데이북>의 놀라운 성취다. 이주혜 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