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렁구시렁 일흔
박범신 지음/창이있는작가의집·1만8800원
작가 박범신(
사진)이 신작을 내놨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설이 아니라 시집이다. 그것도 손글씨를 인쇄한 ‘육필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은 2016년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트위터를 통해 사과 뜻을 밝히며 소설 쓰기를 중단했던 작가가 “실체 없는 허방에 빠져 많이 아팠던 통한의 시기”에 소설 대신 썼던 시들을 ‘희노애락애오욕’ 일곱 장으로 나누어 실었다.
“밤 늦게 늙은 아내와/ 마주 앉아/ 생막걸리 나누어 마시면서/ 구시렁구시렁/ 낮의 일로 또 싸운다// 삶의 어여쁜 새 에너지/ 구시렁구시렁에서 얻는다”(‘구시렁구시렁 일흔’ 전문)
표제작에서 작가는 같이 늙어 가는 아내와 술을 마시며 말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그 싸움은 파괴적·단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 그것도 “어여쁜” 에너지를 그 싸움은 가져다 준다. ‘구시렁구시렁’이라는 의태어는 부부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는커녕, 일상의 잔재미를 실어 나르는 윤활유와 같은 느낌을 준다.
“찰랑찰랑 머물고/ 얼쑤절쑤 흐르는가// 나는 바람/ 애오라지, 이야기하는 바람// 탄생 이전부터 오늘,/ 먼 먼 내일까지// 아무도 나를 붙잡을 수 없네”(‘정체성 1’ 전문)
타고난 이야기꾼, 소설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수긍하고 자부하는 이 시는 소설 쓰기에 관한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읽을 때 아프게 다가온다. “누군가와 나누려고 하는 말들은/ 질려요 이제/ 할수록 헛발질만 커지는 말 말들/ 우리말사전이 두꺼울수록/ 당신들과 더 멀어지던 아픔을 기억해요”(‘위로’), “문장들이 줄지어 내게로 스며들고/ 내가 그것들에게 활강으로 흘러가/ 어둡고 환한 골방에서/ 우리가 매일 한 몸이 되던/ 반세기 밤낮이 그리워 울었네/ 헛것들이었던가 하고 울었네”(‘세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등이 특히 그러하다.
‘희노애락애오욕’ 일곱 장에 이어서는 ‘그 너머’라는 제목 아래 시가 아닌 짧은 산문들이 묶여 있다. 이 가운데 ‘문장의 기원’은 폐암 수술을 받으며 담배를 끊게 된 작가가 흡연과 글쓰기의 관계를 밝힌 글인데, 그 핵심은 이러하다. “좋은 문장은 긍정으로 잉태되고 사랑으로 자라는 게 아니다. 좋은 문장은 분열로 잉태되고 자학으로 자란다. 흡연은 자학의 손쉬운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흡연은 죄가 없다.”
비록 인쇄된 것이라고는 해도 작가가 직접 쓴 손글씨는 활자와는 다른 멋과 분위기를 지녔다. 역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과 작가의 사진들 그리고 단행본으로는 처음 묶이는 단편소설 한 편까지 더해져서 이 책은 일종의 작가 앨범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