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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 삶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등록 2021-04-16 05:00수정 2021-04-16 10:44

[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고광식 옮김/레모(2021)

‘한쪽에는 남자들의 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길이 있지만’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요리와 청소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지 않았고, 앞치마를 두르고 감자껍질을 깎는 아버지는 주위에서 ‘별난 사람’으로 통했다. 온전한 여자아이의 세계에 타인의 시선이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가톨릭계 학교에 다니면서부터이다. 이곳은 “너는 분명 네 엄마처럼 식료품점을 하겠지!”와 “여러분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에요!”와 같은 폭력적인 말들이 잔잔히 넘실댄다. 학교와 함께 여자아이의 의식에 틈입해 들어오는 바깥 세계의 또 한 축은 또래문화이다. 소녀들은 남자들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쉬운 여자’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결국 ‘언제나 감시당하고 속박당한 몸은 느닷없이 눈, 피부, 머리카락 등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조각들로 산산조각이 난다.’

‘생각보다 더 큰 야망’을 품고 들어선 대학 역시 “문학, 언어 분야는 계집애들 몫이야.” “남자는 과학을 하는 게 나아.” 같은 차별의 말들이 넘실댄다는 점에서 어린 시절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처녀성에 대한 고민과 피임에 대한 불안, ‘쉬운 여자’로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 끊임없이 들려오는 임신과 낙태에 관한 ‘살 떨리는 무서운 이야기들’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믿어볼 만한 남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희망’하면서 여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예정된 함정, 오 미친 사랑’은 ‘설거지와 요리가 나의 공부와 바흐를 조금씩 갉아먹는 생활’이다. 이 태생적인 불평등에 분노한 여자는 ‘남편에게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하려는 마음’으로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 한 마리 짐승이었던 출산의 밤을 거쳐 끝날 것 같지 않은 수유와 기저귀의 밤을 통과하며 여자는 이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이 오로지 자신의 몫임을 깨닫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선택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이었는지를 통렬하게 자각한다. 남편에게 집은 직장에서 돌아와 편히 쉴 곳이 되고 여자에게는 아이와 남편의 요구, 먼지, 세탁, 요리, 설거지와의 전쟁터가 된다. 이렇게 ‘사회는 잘 돌아간다.’ 그러나 여자는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의 아이가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도저히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자의 자기 파괴적 충동이 가속기를 밟으며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게 둘째를 낳기로 선택하는 장면은 저절로 눈이 질끈 감길 만큼 고통스럽다.

어느덧 아이 둘을 잘 키우고 세 개 학급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가정을 원활하게 보살피는 여자의 모습은 언뜻 일과 가정 사이에 조화를 이룬 현명한 여성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얼어붙은 여자’로 명명하며 소설을 끝낸다.

<얼어붙은 여자>는 아니 에르노가 1981년 발표한 세 번째 작품이자 스스로 소설이라고 부른 마지막 작품으로 여자아이가 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불평등한 구조와 편파적인 문화를 세밀한 기억으로 복구해낸 사회인류학 보고서로도 읽힌다. 여자의 삶은 매 순간 자신의 선택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선택의 배후에는 개인의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거대한 제도와 사상의 힘이 작용했음을 작가는 초연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실제로 작가는 한국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년과 소녀가 함께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통이라는 것이 깨어나서 자신의 모델을 강요한다. (…) 우리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속에서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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