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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쫄깃한 숙성

등록 2021-04-23 05:00수정 2021-04-23 09:30

[책&생각] 책거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방치된 오븐을 활용해 빵을 만들기 시작한 게 지난해였습니다. 강력분 밀가루에 설탕과 소금, 이스트를 넣고 물이나 우유, 달걀로 반죽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반죽이 손에 들러붙지만, 물을 적당히 넣고 충분히 주무르면 이내 탱탱하고 부드럽고 쫄깃한 덩어리가 만들어지죠. 잘 버무려진 반죽이 손에 와닿는 첫 감촉은 묘한 데가 있습니다.

오븐에서 꺼낸 빵은, 냄새는 그럴듯한데 뭔가가 부족했습니다. 쫄깃하기보다는 단단한 쪽에 가까웠습니다. 문제는 숙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정한 온도·습도에서, 적정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데, 아마추어 취미 수준에서 정밀한 조리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마구잡이로 식빵을 만들고 쿠키를 넘어 크루아상까지 건드렸는데, 과한 의욕은 실패로 끝났고 빵을 한동안 잊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빵은 인생과 같다고들 하지>(바다출판사·2019)를 만나게 됩니다. 저자는 수백킬로미터를 운전해 이스트 공장을 찾고 밀가루 제분소를 방문합니다. 밀을 직접 수확하겠다는 생각까지 품지요. 파리까지 날아가 제빵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에서 빵을 굽습니다. 완벽한 빵을 만들겠다는 집념 하나로요. 그러나 원하는 빵은 나오지 않고 지쳐갑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바, 최고의 빵을 재현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었습니다. 속박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정말 즐겁게 빵을 구웠다”고 고백합니다.

책 담당 기자의 일상은, 한두 걸음 뒤에서 벌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각기 나름의 숙성 과정을 거쳐 나온 책을 펼치노라면, 짧게 잡아도 한두 철은 지나 풍부하게 숙성된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책을 읽는 과정 역시 숙성의 시간입니다. 요새는 매주 일요일 이른 아침 작은 빵 한덩이를 굽습니다.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책을 펼치며 ‘나’를 쫄깃하게 숙성시킨다는 상상에 빠져듭니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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