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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숲 가꾸기’에 맞서 싸울 때

등록 2021-05-21 04:59수정 2021-05-21 10:21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인간과 자연의 비밀 연대
페터 볼레벤 지음, 강영옥 옮김, 남효창 감수/더숲(2020)

지금으로부터 9950여년 전에 가문비 씨앗 하나가 스웨덴의 산악 지대에 홀로 떨어져 싹을 틔웠다. 그때 우리 조상들은 석기시대를 살고 있었다. 2018년 5월, 독일의 세계적인 숲 보호 활동가 페터 볼레벤이 세바스티안 키르푸라는 친구와 그 산악지대를 걸었다. 세바스티안이 갑자기 반쯤 썩은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만지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세바스티안이 본 것은 늑대이끼였다. 옛날 사람들이 늑대를 죽이는 데 그 식물의 독을 이용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늑대이끼는 멸종위기종이다. 늑대이끼가 자라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몇백살은 된 소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그 소나무가 죽어야 한다. 그다음에 나무줄기가 부패해야 한다. 그러나 소나무 나무줄기는 쪼개질지언정 쉽게 부패하지 않는다. 작은 늑대이끼가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하고 인간의 발 빠른 시간 속에, 늑대이끼가 발붙일 틈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늑대이끼의 운명을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어쨌든 드디어 페터의 눈앞에 가문비나무가 나타났다. 온갖 악조건을 뚫고 살아남아 강인함의 상징이 된 지구상 최고령 나무, ‘올드 티코’. 그 나무 앞에 선 페터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 잠시 아무 말 하지 않고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무가 이 높은 곳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을지 상념에 잠겼다. 이곳에서 씨앗이 싹을 틔운 후 일만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매머드가 멸종했고 스톤헨지가 세워졌으며 피라미드가 건축되었다. 냉한기에서 온난기, 온난기에서 다시 냉한기로 여러 차례 기후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가문비나무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황량한 저 먼 언덕으로 데려간다. 나무의 시간은 뭘까, 씨앗과 나무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일까 묻게 한다. 페터가 느낀 감동은 그 혼자만의 감동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감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비밀연대>라는 책에 나온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과 자연이 맺을 수 있는 제일 좋은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는 ‘연대’다. ‘개입’이 아니라 ‘연대’다. 그는 “나무를 벌목하면서 동시에 기후변화와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재조림으로 인한 변화는 여름 온도가 상승한 것이다”, “벌목 하고 나서 새로운 나무를 심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관료들이 있는데 이것은 나무가 죽은 뒤 어떻게 되나를 생각하지 않아서다. 죽은 나무는 탄소를 엄청나게 배출한다”, “기후위기 시대 해법은 목재 소비량을 줄이고 인공림을 원시림으로 바꾸는 것이다” 등의 주장을 과학적 근거와 함께 제시한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 산림청장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산림청은 최근에 오래된 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어린 나무를 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어린 나무가 오래된 나무보다 탄소를 많이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주장을 할 때 어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했는지 그때 누락시킨 것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산림청은 숲 가꾸기란 이름으로 숲을 훼손하고 생명다양성을 훼손하고 미래세대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산림청 해체론이 나오는 이유다. ‘숲 가꾸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단어를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제는 이 단어와 맞서 싸울 다른 단어를 고민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 앞에 경이로움과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인간도 잘 살 것 같지가 않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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