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의 신작 소설 <문명>은 인간 문명이 몰락한 자리에 인간과 동물이 공생하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의 모험을 그린다. 열린책들 제공
문명 1,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열린책들·각 권 1만4800원
“한때 인간 문명이 융성했던 자리는 담쟁이덩굴과 가시덤불에 뒤덮여 흔적만 남아 있다. 사방에 해골이 나뒹굴고 쓰레기 더미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들의 외벽에 나 있는 음산한 포탄 구멍이 대멸망 이전에 벌어졌을 내전의 격렬함을 짐작하게 한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문명>은 인간 문명의 폐허 위에서 전개된다. 신종 페스트와 테러, 내전으로 세계 인구가 8분의 1로 줄고 수적 우세를 앞세운 쥐 떼가 신흥 강자로 등장한다. 베르베르의 전작인 <고양이>에 이어지는 이 소설은 <고양이>의 주인공이었던 암고양이 바스테트가 다시 주인공으로 나와, 무너진 문명과 새롭게 들어설 문명의 ‘이어달리기’를 모색한다. “나는 곧 세상을 지배하게 될, 지금의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진화시킬 존재야.” 고양이 머리를 한 고대 이집트 여신의 이름을 지닌 이 야심만만한 고양이는 말하자면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들려 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지만 용기와 지혜 역시 지닌 바스테트가 자신의 집사인 여자 인간 나탈리와 수컷 샴고양이 피타고라스, 사자 한니발, 앵무새 샹폴리옹 등 동지들과 함께 쥐 떼의 공격에 맞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모험을 펼치는 우화적 이야기가 <문명>의 얼개다.
“당신은 곧 사라질 낡은 세계의 일원이에요.”
바스테트는 집사 나탈리에게 이런 마음속 말을 건넨다. 나탈리는 물론 바스테트를 사랑하는 좋은 집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한 인간 문명은 이제 시효가 다했다는 것이 바스테트의 판단이다. 페스트의 창궐과 인간 자신이 인간의 최대 포식자가 되는 테러와 전쟁의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처우는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대목이다. 인간 문명의 몰락 이후 동물들은 종별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 공동체 또는 국가를 이루어 사는데, 돼지들이 점유한 도축장에서는 포로로 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 벌어진다. 이 재판에서 돼지 검사 생쥐스트는 도축과 투우, 동물 실험 등 인간이 동물들에게 가한 악행을 열거하며 사형 판결을 촉구한다.
“제가 알게 된 사실들에 근거해 말씀드리면, 모든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벌로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모두 악당은 아니며 인간의 어떤 행위들은 동물들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변호인은 항변하지만, 재판을 주재하는 돼지 왕 아르튀르의 생각은 검사 쪽에 기울어 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오. 세상은 그들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들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니까.”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관점에서 지구와 문명에 관해 사유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문명>은 인간중심주의의 대척점에 놓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전적으로 반인간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제를 담은 ‘문명’이라는 제목은 기존의 인간 문명을 제로로 돌린 상태에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성과를 이어받는 인간-동물의 협동 문명을 가리킨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샴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비롯해 몇몇 동물의 머리에 생긴 유에스비(USB) 단자 구멍이다. ‘제3의 눈’이라 불리는 이 구멍에 유에스비를 꽂으면 동물들은 인간의 컴퓨터에 접속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피타고라스뿐만 아니라 돼지 왕 아르튀르와 쥐 떼를 이끄는 흰쥐 티무르 등이 대학 실험실에서 같은 수술을 받았고, 소설 중반부에서는 주인공 바스테트 역시 자발적으로 ‘제3의 눈’ 설치 수술을 받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억의 수호자’라는 별명을 지닌 로망 웰즈 교수가 흥미롭다. 문명 붕괴에 대비해 인류의 모든 지식을 한데 모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편집하고 보급하는 그는 다름 아니라 베르베르의 첫 소설 <개미>에 등장했던 이 백과사전의 집필자 에드몽 웰즈의 후손. 로망은 선조의 작업을 대폭 보완한 신판 사전을 유에스비 하나에 담았는데, 쥐 떼들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이 유에스비를 목걸이로 만들어 바스테트의 목에 걸어 준다는 사실이 상징적이다. 새로운 문명의 건설자를 자부하는 바스테트가 “나, 바스테트의 가슴에 인류의 모든 지식이 얹어져 있다”며 뿌듯해할 만한 설정이다. 베르베르의 지문과도 같은 ‘…백과사전’의 다채로운 항목들은 소설 <문명> 본문 속에도 풍부하게 삽입되어 있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전통적인 쥐와 고양이의 힘 관계를 무시하듯 고양이 무리를 공격하고 학살하는 쥐 떼의 ‘서해(鼠海) 전술’, 그런 쥐들에 맞서 고양이의 공격 방식과 태권도를 결합한 ‘캣권도’ 같은 신조어들이 웃음을 깨물게 한다. 쥐의 왕 티무르는 물을 절반쯤 채운 유리병 안에 쥐를 하나씩 넣어 놓고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에서 검질기게 살아남았고 그 경험 때문에 “인간들을 향한 무한한 적개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가 번역기를 통해 바스테트와 대화하면서 ‘잔인함이란 곧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인간인 독자는 그 말에 섣불리 반박하기 쉽지 않다.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파리에서 쥐 떼와 맞서 싸우던 바스테트와 동료들은 소설 말미에서 ‘약속의 땅’을 찾아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과연 그들이 찾는 희망과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베르베르는 <고양이>와 <문명>이 3부작 소설의 1·2부라고 밝혔는데,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일행들의 운명은 마지막 3부에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생명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서 조화롭게 작동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몸속에 있는 세포들처럼 연결되”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역시 마지막 3부에서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신작 소설 <문명>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