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천운영 단편 ‘아버지가 되어주오’
<현대문학> 2020년 8월호
십대와 이십대 시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단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도 밥 먹듯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엄마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을 한 이들에게서 메시지를 받는다.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인 말이나 글, 혹은 간접적인 눈빛이나 은근한 말을 통해, 나는 생생하게 인식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돌보는 걸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가는 내 삶이 누군가에겐 ‘되지 않고 싶은’ 모습이라는 걸.
그런 메시지를 서운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이해하거나 공감하거나 연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엄마’로 표상되는 수많은 ‘유자녀 성인여성’에게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냈던 나는 스스로 ‘유자녀 성인여성’, 번번이 ‘아줌마’라 불리는 위치에 놓인 다음에야 알았다. 젊은 날 하고 다녔던 말과 행동이 상대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무례한 공격이었으리란 것을. 유자녀 성인여성이 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했던 언행들이 무엇이었는지. ‘나’라는 인간을 경유해 나간 메시지의 발원지가 어디였는지.
‘아버지가 되어주오’를 읽는 것은 어리고 치기 어렸던 시절의 나와 조우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삼사십대 시절의 나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나는 한없이 내주기만 하는 엄마에게 울분을 느끼는 소설 속 딸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수동적으로 순응하기만 하면서 살아왔다’고 엄마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딸에게 제 인생의 빛났던 순간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엄마의 마음도 백분 이해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나는 어떨까. 젊은 날 내가 했던 언행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부터는 누군가에게 내가 전적으로 옳고 나와 달리 생각하는 당신은 틀렸다는 암시를 보내지 않게 될까. 생각하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십중팔구, 나는 또 누군가에게 그런 암시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제 경험의 자장 안에서만 세상을 보는, 그러면서도 자신은 ‘편견 없이 넓게 볼 줄 안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끈덕지게 달고 다니는 어리석은 사피엔스 종이기에. 그렇기에 앞으로도 나는 꾸준히 타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리라. 특히 이런 종류의 이야기, 삶에서 길어 올린 통찰을 꾸준히 내놓는 오랜 나무 같은 작가가 써내는 품 넓은 소설을. 그를 통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든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음을, 세상에 단선적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는 삶은 하나도 없음을 배워야 하리라. 좁디좁은 우물에서 파닥거리는 ‘나’라는 인간을 정교히 비추어보고 부끄러워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하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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