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감추지 못한 적의, 가눌 길 없는 분노

등록 2021-06-11 05:00수정 2021-06-11 10:11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문학동네·1만4800원

최은미(사진)의 세 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는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된 단편 아홉이 묶였다. 이 가운데 가장 최근 작품으로 올해 현대문학상을 받은 ‘여기 우리 마주’에는 코로나19 대유행이 빚은 풍경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하는 학교에 보호자가 대신 가서 교과서를 받아 오고, 카페 한쪽에는 거리 두기를 위해 걷어낸 테이블과 의자들이 거꾸로 쌓여 있으며, 자가격리 중인 주인공에게는 티슈와 김, 초코 과자, 손 세정제 등이 든 구호품이 배달된다.
최은미.
최은미.

이 소설의 화자인 나리는 초등 6학년 딸을 둔 엄마인데, 비누와 향초 등을 만드는 공방을 열자마자 코로나 대유행으로 타격을 입는다. “일을 벌였는데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은 직접적으로는 코로나 때문이지만, 그 저변에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동안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던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어쩌면 맞춰가고 있다고 믿었던 일과 가사와 육아의 균형을 2020년 봄은 다시 원점으로, 원점 그 이전으로 밀고 가고 있었다.”

딸 친구의 엄마이며 공방 수강생이기도 한 수미는 학원 승합차를 모는 일을 하는데, “정확한 차량 시간과 아이들 승하차 안전 둘 다에 신경을 쓰느라 늘 곤두서 있고 지쳐 있었다.” 소설의 결말에서 수미는 확진자가 되어 입원하고 나리는 음성 판정을 받아 자가격리에 들어가지만, 두 여성 주인공에게 코로나보다 더 무겁고 힘겨운 것은 유자녀 기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일이다. 남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 “다 감추지 못한 적의. 가눌 길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수미가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보내는 이’가 ‘여기 우리 마주’와 비슷하게 유자녀 기혼 여성들 사이의 우애를 넘는 동일시와 몰입을 다룬다면, 2017년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과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친족 성폭력이 남긴 후유증을 아프게 그린다. ‘눈으로 만든 사람’은 어린 시절 삼촌 강중식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강윤희가 여덟 살짜리 딸이 있는 제 집에 강중식의 아들 민서를 보름간 들이게 되면서 겪는 마음의 갈등과 불안을 담은 작품이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어린 시절 당한 친족 성폭력 경험을 소설로 쓰고 그 소설이 실제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밝힌 산문까지 발표한 작가 유정과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을 통해 상처의 문학적 승화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에 관해 생각하도록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