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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기찻길 옆 공부방’ 만든 한국건축의 ‘양심’ 하늘로 떠났다

등록 2021-07-03 21:27수정 2021-07-05 02:35

‘채나눔’의 건축가 이일훈 대표 별세
‘작고 불편한, 나눠 늘리는 건축’ 역설
마지막 원고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
고 이일훈 건축가. 2017년 3월 <한겨레> 인터뷰 때 모습이다. 강성만 기자
고 이일훈 건축가. 2017년 3월 <한겨레> 인터뷰 때 모습이다. 강성만 기자
‘기찻길 옆 공부방’이 건물 이름이었다. 23년 전인 1998년 연말, 인천 동구 만석동 9번지 빈민 마을에 들어선 노출 콘크리트 벽체의 3층짜리 회색 집은 이 땅의 현대건축사에 독특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경인선 철로 근처에 자리한 건물의 주인은 동네 아이들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연명하는 부모들을 잘 보지도 못하고 골목길에서 빈둥거리던 아이들에게 놀고 공부하고 재잘거리는 공간을 주기 위해 지어졌다.

건물 자리는 연건평 148㎡(45평) 정도에 불과했다. 공사비는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었지만, 설계자는 학습실은 물론, 옥상마당과 동네를 조망하는 쌈지마당까지 오밀조밀하게 나눠 공간을 꾸몄다. 누구나 들어와서 공부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동네를 살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건물 공간을 잘게 나눠 짓는 ‘채나눔’과 ‘공동체 문화의 회복’이란 건축가의 생각을 풀어낸 결실이었다. 먹고 사는 용도에 맞춰 얼기설기 대충 집을 짓는 정도로만 치부해온 대도시의 달동네 서민 건축에서 건축가의 철학과 개성이 들어간 ‘저비용 프로젝트 건축’이 처음 시도된 사례란 점에서 평단과 언론의 각별한 조명을 받았다.

한국 현대건축의 색다른 명작으로 기억되는 ‘기찻길 옆 공부방’의 설계 주역인 이일훈 건축연구소 후리 대표가 지난 2일 오후 오후 5시14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

고인은 한양대 건축과 출신으로, 1985~89년 건축 거장 김중업(1922~88)의 연구소에서 일한 말년 제자다. 그 뒤 1990년대 건축연구소 후리를 세워 설계와 건축비평 등을 함께 하면서 ‘작고 불편한 건축, 나누고 늘려 사는 건축’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자는 ‘채나눔’의 건축담론을 역설해왔다. 1990년대 소장 건축가들이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을 모색하기 위해 결성한 ‘4·3 그룹’에도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사회 현실과 함께하는 건축, 생태주의와 공동체를 생각하는 건축을 신념처럼 역설했다. 영리 위주의 상업건축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도시 서민과 종교 수행자, 출판인들을 위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천착했다. 건축비평과 언론 칼럼 집필, 대중 저술, 주거 공동체 활동에도 열정을 기울였던 문화활동가이기도 했다.

1998년 말 인천시 만석동 기찻길 옆 달동네에 들어선 이일훈 작가의 대표작 ‘기찻길 옆 공부방’. 서민촌의 환경과 공간적 특징을 반영한 노출콘크리트 건물로 아이들의 학습과 놀이를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작가 특유의 채나눔 건축론과 공동체 미학이 잘 발현된 역작으로 평가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말 인천시 만석동 기찻길 옆 달동네에 들어선 이일훈 작가의 대표작 ‘기찻길 옆 공부방’. 서민촌의 환경과 공간적 특징을 반영한 노출콘크리트 건물로 아이들의 학습과 놀이를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작가 특유의 채나눔 건축론과 공동체 미학이 잘 발현된 역작으로 평가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표작으로 ‘기찻길 옆 공부방’, 난간 없는 계단과 폭 75㎝짜리 ‘겸손의 복도’로 유명한 경기도 화성 ‘자비의 침묵 수도원’, 충남 홍성 ‘밝맑도서관’, 서울 마포구 성미산 공동주택 ‘소행주’ 등이 있다. 건축 에세이집 <모형 속을 걷다>(2005)를 비롯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2011), <제가 살고 싶은 집은>(공저, 2012) 등 저술 10여권도 남겼다.

고인의 사위 김형규(홍신애요리연구소 대표)씨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출간하지 못한 아버님의 마지막 원고에 이런 문장이 두 번 반복돼 쓰여 있었다”고 소개했다. ‘평생 건축하고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으니,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고,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

유족으로는 딸 지선(전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장)·지은씨, 아들 진규씨 등이 있다. 빈소는 고려구로병원, 발인은 5일 오전 4시30분이다. (070)7606-4216.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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