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라는 이름을 가진 심술궂고 못된 마녀가 살았다. 어느 날 루시는 지금까지 사랑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과연 이런 못된 마녀를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동화 이야기로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그 아이의 엄마인 감독은 딸이 마녀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자신도 엄마에게 마녀였을까, 질문을 던진다.
다큐멘터리 <까치발>(권우정, 2019)은 모녀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자, 남들과는 다른 딸의 모습을 다름이 아니라 부족함으로 바라본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인 고백이다. 양수가 미리 터지는 바람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잘 자라나 모두에게 기쁨이 된 딸 지후. 하지만 그 영향인지, 까치발로 걸음을 걷는 증상을 가지게 된다. 까치발로 걷지 말라고 하지만, 아이는 느낌이 좋다며 그 걸음걸이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엄마인 감독은 딸의 그러한 걸음걸이가 경미한 뇌병변의 징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불안에 휩싸인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계속 반복하던 감독은 자신의 불안을 공유하고, 해소하고 싶어 다른 장애 자녀의 부모들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한다.
감독이 만난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죄책감을 갖고 있다. 특정 음료를 많이 마셔서 그랬을까? 아니면 일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을까? 열 달 동안 자신이 품고 있던 아이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닌지 곱씹고 곱씹는다. 감독은 다른 어머니와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을 계속 반추해본다. 불안의 원인을 곱씹어 볼수록 자신이 아이의 ‘까치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사회 자체에 문제의 원인이 있음을 점점 깨닫게 된다.
왜 그렇게 딸의 까치발을 고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왔는지, 원인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감독은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돌아본다. 딸에 대한 기대를 품었던 어머니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하던 딸. 하지만 어머니의 모든 기대에 부응하는 딸의 모습은 판타지에 가깝다. 감독은 어머니에게서 인정받지 못해 힘들어하던 자신을 바라보며, 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자신이 오히려 까치발로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 감독의 성찰 이후 카메라는 지후의 슬픈 눈을 담고 있다. 딸 지후는 자신을 다그치는 엄마에게 이미 많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감독은 편집할 수도 있을 법한 자신의 마녀 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가 마무리될 때쯤 딸 지후는 엄마가 마녀라면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마녀가 천사 지후에게 같이 살 수 없냐고 물어보자, 수줍게 이야기한다. 한번 노력해볼게. 그런 지후의 말이 단단하게 엄마를 끌어안는다. 마지막에 엄마와 함께 있고 싶다며 엄마를 힘차게 안았다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지후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까치발을 하고 있다. 마치 그 걸음걸이는 그것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사회에 맞서 점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법처럼 그렇게 지후의 걸음걸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