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랑에 빠지고, 같은 깊이만큼 사랑하고, 동시에 사랑이 식는다면, 누구도 아파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다르고, 사랑하는 속도가 다르다. 이별의 이유가 다르고, 헤어진 뒤 그 사람을 잊는 시간도 다르다. 먼저 사랑해서 가슴 아프고, 더 많이 사랑해서 속상하고, 더 미련이 남아 슬프다.
시작은 연애 예능프로그램 <환승연애>였다. 헤어졌던 연인들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을 요즘 소풍 가는 날처럼 손꼽아 기다린다. 다음 금요일을 기다리다 지칠 때쯤 이 드라마를 만났다. 그러다 여기 또 빠지고 말았다. <환승연애>처럼 이 드라마에도 ‘과몰입’한 사람들이 많다.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훌루에서 공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오티티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아일랜드 드라마 <노멀 피플>이다.
아일랜드 작은 도시의 어느 고등학교. 외톨이였던 메리앤은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는 코널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친구들이 많은 코널은 메리앤과 사귀는 것을 비밀로 한다. 그래서 댄스파티에 다른 여자와 가게 되고, 그 일로 메리앤과 헤어진다. 드라마는 그때부터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두 사람의 5년간 이야기를 담았다. 사랑하는 상대만 알고 있는 내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인 것 같다. 옛사랑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학에서 코널을 다시 만난 메리앤은 말한다.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에 네가 있을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인생에 다시 들어오면 좋지 않을까?”
사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줄거리에 있지 않다. <노멀 피플>의 진짜 힘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상대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아주 짧은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데 있다. 울고불고 난리 치며 헤어지지만, 사실 이별의 시작은 아주 작은 자존심과 이기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아직 세상과 맞서기엔 어린 나이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이지만 세상과 싸우며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 그래. 그게 내 삶의 시작이었어.”
<노멀 피플> 은 19 91 년생인 샐리 루니가 27살에 출간한 소설이 원작이다. 전세계에서 100 만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브리티시 북어워드> 를 비롯해 <타임> <파리리뷰> 등에서 ‘올해의 책 ’ 에 선정되었다. 엠제트(MZ) 세대가 맞닥뜨린 내면의 갈등과 불안, 그리고 계급 사회의 모순을 섬세하고도 정확히 묘사 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원작부터 훌륭하지만, 드라마 연출도 완벽하다. 모든 장면에서 주인공의 감정이 느껴진다. 사건을 보여주기보다는 감정에 집중하여 가슴을 울린다. 어둡고 차분한 아일랜드 분위기도 드라마와 잘 어울린다. 메리앤의 관점에서 사랑을 따라가다가 이별하고 나면 코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연출이 주인공의 감정보다 앞서가지 않고 살짝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지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성장했다. 그 사람이 곁에 없는 지금도 잘 살고 있지만, 그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아마도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옛사랑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과연 헤어졌던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환승연애>에서 호민과 보현의 두번째 이별을 보고 함께 눈물 흘렸던 분이라면 <노멀 피플>을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난 갈게” “난 남을게”라는 평범한 대사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에서 빠져나올 때쯤, 다시 <환승연애>를 보면 완벽할 것 같다.
아, 그런데 잊은 게 하나 있다. <노멀 피플>은 ‘청불’ 드라마다. 심지어 아일랜드 드라마 역사상 가장 ‘야하다’는 평을 들었다. 몽글몽글한 첫사랑 학원물인 줄 알고 보면 큰일이 난다.
씨제이이엔엠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