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LA) 에인절스의 오타니 쇼헤이 선수. 애너하임/AP 연합뉴스
필자 머릿속에는 주제별로 수많은 음악이 정리돼 있다. 직업병이다. 라디오 피디로 매일 노래를 고르는 일을 하다 보니 ‘○○할 때 듣기 좋은 노래’ 리스트를 백개쯤 만들어놓은 셈이다. 렌카의 노래 ‘더 쇼’는 두개의 목록에 들어가 있다.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 그리고 야구와 잘 어울리는 노래.
야구는 가장 낭만적인 스포츠 종목이다.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축구나 농구에 비하면 그다지 치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달리기나 수영처럼 정확한 느낌도 없다. 일단 선수들이 실제 뛰는 시간보다 관중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시간이 더 많다. 장난도 치고, 껌도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러다 보니 인생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학적 분석이 도입되면서 야구의 낭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록과 자료의 합산인 ‘스탯’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공이 배트에 맞는 각도까지도 소수점까지 계산해 타격 폼을 수정하고, 선발투수가 한 경기를 던지면 며칠을 쉬는지도 루틴이 정확히 지켜진다.
예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결승까지 올라간 롯데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진은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했다. 딱 한명 최동원 선수가 삼성을 상대할 만했다. 그래서 당시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이렇게 부탁했다.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7차전 중 4번을 던져달라는 황당한 소리였다. 혹사 차원을 넘어 몸이 망가질 수도 있는 제안이었지만 최동원 선수는 쿨하게 대답했다. “알겠심더. 마, 함 해보입시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팔이 부러졌냐고? 인터넷으로 찾아보시길.
다 옛날얘기다. 이제 이런 비상식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몇배는 더 냉정하게 스탯을 따지는 메이저리그에서 상식을 뒤집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온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며 양쪽 모두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내고 있다.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왕인 동시에 정상급 선발투수이며 팀에서 최고 도루 기록을 자랑한다. 최우수선수(MVP)는 이미 확정적이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미국 야구의 전설들이 앞다퉈 그를 경배한다. 점점 식어가던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되살리는 슈퍼히어로가 나타났다며.
오타니의 대성공이 감동까지 주는 이유는 수년간의 도전과 실패를 이겨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하고 2018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각종 부상으로 암흑기에 접어든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조언했다. 투타 겸업이 가능하다면 왜 다른 선수들은 그렇게 안 했겠느냐, 과학과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라도 투타 겸업을 포기하고 하나만 선택하면 재기할 수 있다 등등.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모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기적의 시즌을 보여줬다. 다음 시즌은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올해 그가 보여준 기적은 영원히 회자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버팀목이 돼줄 것이다.
지금도 꿈을 위해 도전하는 선수들이 있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박효준 선수가 쳐낸 단 하나의 홈런도 수십개에 달하는 오타니의 홈런만큼 가치 있다. 한국에서 ‘대투수’ 소리를 듣다가 메이저리그로 건너간 양현종 선수의 아직 이뤄지지 않은 선발 1승도 오타니의 10승만큼 가치 있다. 야구는 기록과 과학의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꿈과 도전, 그리고 낭만의 스포츠임을 오타니가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앞에서 말한 렌카의 ‘더 쇼’ 가사를 보자. 노래는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응원이다. 삶은 미로고 사랑은 수수께끼라고 노래한다. 종종 우리는 길을 잃고 잔뜩 겁먹었으면서도 티 내지 않으려는 아이가 되지만, 그럴 때면 잠시 멈추고 내버려두자고 노래한다. 인생은 한편의 쇼고 우리는 티켓을 갖고 있으니 가끔은 그냥 즐기자고 노래한다. 야구를 전혀 몰라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야구 영화 <머니볼>에서 어린 딸이 아빠(브래드 핏)를 응원하려고 불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당신의 도전을 위해 이 노래를 응원가로 바친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