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제28회 미국 배우조합상(SAG) 시상식에서 티브이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배우 이정재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배우조합(SAG)으로부터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30여년 연기인생의 또 다른 전성기를 맞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그에게 글로벌 배우의 입지와 전세계적인 명성을 안겼지만, 사실 그는 청춘스타로 출발해 멜로와 사극, 액션, 코믹을 넘나드는 연기의 폭을 지닌 드문 배우였다.
이정재는 21살 때인 1993년,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했다. 당시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다 ‘스타제조기’로 불린 배우 겸 디자이너 하용수씨에게 발탁돼 연예계에 입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첫 영화는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젊은 남자>(1994)지만, 그를 벼락스타로 만든 작품은 에스비에스 국민드라마 <모래시계>(1995)였다. 목숨을 바치면서 윤혜린(고현정)을 지키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할로 그는, 여성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며 일약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국민드라마로 불린 에스비에스 <모래시계>에서 백재희 역할로 출연한 이정재. 한겨레 자료
절친인 정우성과 함께 출연한 김성수 감독의 영화 <태양은 없다> 스틸컷. 한겨레 자료
군복무 뒤 <불새>와 <박대박> 같은 영화에 출연하던 그에게 또 한번의 도약의 계기가 찾아왔다. 정우성과 함께 출연한 김성수 감독의 영화 <태양은 없다>(1999)가 그것. 이 영화에서 그는 삼류 양아치 홍기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해내며 눈부신 외모에 비해 연기력은 부족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그에게 청룡상과 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이 영화로 평생지기가 된 정우성은 당시 그에 대해 “그전에 나왔던 남자 배우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다. 신인이었는데, 신인 느낌이 안 들 정도로 한 배우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도둑들> 스틸컷. 쇼박스 제공
이후 이정재는 <이재수의 난>을 비롯해 <인터뷰> <순애보> <흑수선> <선물> <오, 브라더스> <태풍> 등 사극부터 멜로와 한국형 블록버스터까지 10여년 동안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의 폭을 확장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한 작품은 드물었다. 첫 번째 슬럼프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한물간 배우’라는 시선이 지배적일 때, 그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이어 2012년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서 비열한 ‘뽀빠이’ 역할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배우 대열에 합류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박훈정 감독의 느와르 영화 <신세계>를 통해 대중에게 다시금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경찰 신분을 숨기고 폭력조직에 가담한 이자성역으로 위태로운 캐릭터의 내면을 인상적으로 연기하며 자신의 건재를 증명해 냈다.
박훈정 감독의 느와르 영화 <신세계>에서 이자성 역할로 출연한 이정재. NEW 제공
같은해 개봉한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에선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수양대군 역할로 출연해 그동안의 캐릭터들을 갈아 엎으며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시전했다. 압도적인 수양대군 등장신으로 회자되는 이 영화의 출연을 먼저 제안한 한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정재는 현장에서 연기에 대한 열정과 철두철미함으로 매번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성실한 배우였다”고 그를 평가했다.
2015년 최동훈 감독과 두번째 작업한 영화 <암살>에서 그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염석진 역할로 또 한번 연기변신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역할을 위해 15kg이나 감량을 했다는 그를 두고 최 감독은 “시나리오에 있는 캐릭터보다 훨씬 더 창의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해서 나를 놀라게 한 장본인”이라고 추켜세웠다.
그와 함께 <인천상륙작전>(2016)에 출연한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은 “진정한 배우를 만나면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정재씨가 바로 그 진정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제된 아름다움과 집중력, 그리고 지성을 갖춘 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로 출연한 이정재. 쇼박스 제공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독립운동가 염석진 역할로 출연한 이정재. 쇼박스 제공
30년차 배우이면서도 <오징어 게임> 촬영 당시 캐릭터에 몰입하느라 촬영장에서 말이 없었다는 그는 올해 개봉할 첩보영화 <헌트>를 통해 감독 데뷔를 앞두고 있다.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은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오징어 게임> 중 한 장면. 왼쪽부터 배우 박해수, 이정재, 정호연. 넷플릭스 제공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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