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어울리는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본다. 유병록 시인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라는 제목의 시다.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이렇게 시작한 시는 앞날에 대해 침묵하자고, 작은 약속도 하지 말자고, 그리고 나중에 이 봄을 반성하지도 말자고 한다. 크으. 멋지다. 좋은 시 한편은 그저 그런 책 한권보다 낫다. 뭔가 깨달음을 주는 시 같지만 실상 이 시는 교훈하고는 별 상관 없는 연애시다. 아주 짧은데다 시작보다 끝이 정말 예쁘니까 꼭 찾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역대급으로 눈살 찌푸리는 일들이 많았던 대선 레이스(라고 쓰고 ‘폭로 비방전’이라고 읽는다)도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윤석열 당선자에게 바라는 것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뭘 바란다는 식의 기사들이 정말 많고 내용도 무척 비장하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할 것도 많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고. 수년 동안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인데, 정치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도 중요하더라. 윤석열 당선자의 경우 편가르기와 정치보복, 일단 두가지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이번 대선은 여러 면에서 역대급 선거였는데 다들 알다시피 2위 후보와의 격차도 역대급이다. 윤석열 당선자와 이재명 후보의 표 차이가 겨우 24만7천여표다. 이게 얼마나 적은 수인지 예를 들어보자면, 서울에 있는 수백개 동 중에서 신림동이나 화곡동 인구하고 비슷하다. 한끗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는 표현이 절대 과장이 아니고, 말하자면 딱 신림동만큼 이긴 거다. 그러니 당선자는 더더욱 겸손해야 한다.
윤석열 당선자는 선거운동 내내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밝혀왔다. 그 약속 지켜주시길.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필자가 몸담은 언론이나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적을수록 좋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번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철학만은 그대로 계승했으면 좋겠다.
봄을 담은 노래로 시작했으니 봄을 담은 노래로 마무리해야지. 오늘 칼럼의 추천곡은 ‘브로콜리 너마저’의 2008년 곡 ‘봄이 오면’이다. 멤버가 바뀌면서 2012년에 편곡을 해 다시 내놓기도 했는데 원래 버전이 훨씬 좋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방향성은 미술 사조로 치면 극단적인 인상파에 가깝다. 멤버들 스스로 연주 실력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100퍼센트 감성 밴드를 지향한다고 밝혔고 이 노래 역시 그러하다. 감성 충만한 노랫말을 보자.
‘봄이 오면 겨울이 지나가듯
짧았던 사랑은 떠나고
흩날리는 희뿌연 먼지 속에
그저 눈물 글썽이네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나듯
그렇게 가슴은 설레고
흩날리는 새하얀 꽃잎 속에
다시 너를 기다리네’
영어는커녕 한자어조차 찾아보기 힘든 정갈한 우리말 노랫말과 쿵작쿵작 복고풍 디스코 연주가 찰떡같이 어울린다. 나른한 봄날을 달리는 마을버스 차창에 머리를 툭 기대고 부질없는 사랑의 기억을 더듬을 때, 느슨하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노래랄까.
사랑하기 곤란한 계절은 없지만 봄은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이다. 시 한편 노래 한곡으로 사랑의 싹을 틔울 수는 없더라도 겨우내 메말랐던 가슴에 스치는 봄비 한 줄기 정도는 되기를 빈다.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