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팔 올리지 말까”... 한수의 얘기에 은희는 가슴이 콩닥뛴다. 한수의 행동은 진심이었을까. 수학여행을 갔던 목포로 추억 여행을 떠난 두 사람. 티브이엔 제공
4년 만에 내놓은 노희경 작가의 옴니버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티브이엔)가 순항 중이다. 지난 9일 시청률 7%대로 시작해 가장 최근 4회가 9%대로 올랐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의 사연을 옴니버스로 펼치는 20부작 드라마. 지난 16일 첫 번째 이야기 ‘한수와 은희’편이 끝났다.
‘한수와 은희’편은 딸의 꿈을 이뤄주려고 고군분투하는 기러기 아빠 한수(차승원)가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한수는 가난해서 꿈조차 꾸면 안 됐던 시절, 돈을 빌리느라 소중한 친구마저 잃어버리기도 했던 시절, 우리 부모의 모습이다. 한편으론 한수와 은희의 추억 여행으로 찬란했던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도 했다. “가난해지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은희가 호텔 침대에 누워 “뭐하느라 이런 데도 못 와보고”라며 혼자 우는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도 했다.
심심할 수도 있을 내용은 이정은, 차승원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와 감정 표현이 더해져 묵직한 울림을 주며 시청자를 제주,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첫걸음을 잘 내디딘 덕분에 17일 두 번째 이야기 ‘영옥과 정준’편은 9%대로 시작했다.
제주에 사는 은희는 다른 인물이 주인공일 때도 종종 등장한다. 한수는 가족 곁으로 떠났다. 이제 한수는 안 나오나? 한수를 이렇게 떠나보낼 순 없어서 “드라마 찍으면서 너무 행복했다”는 차승원을 18일 전화로 짧게 만났다. “일상으로 훅 들어간 연기는 오랜만이었다”는 그가 말했다. “한수는 20회에 한 번 더 나옵니다.”
― <우리들의 블루스>는 ‘한수와 은희’편으로 시작한 게 좋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좋아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노희경 작가님의 글과 김규태 감독님의 연출이 만났으니 작품이 안 좋을 수가 없죠. 거기에 상대 배우가 이정은씨에요.”
― ‘한수와 은희’편은 중년의 현실과 추억까지 공감 지점이 많아요.
“어떻게 보면 이 시대 중년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에요. 스태프분 중에 기러기 아빠가 있었는데 이 내용에 많이 공감한다고 하더라고요. 또 그 시절엔 한수와 은희처럼 가난해서 꿈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 아버지가 많았으니까. 한수처럼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했으니 그래서 내 자식에겐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이 드라마에 담겨 있잖아요. 그러면서 먹고 살기 바빠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가 들었는데. 한수와 은희의 추억 여행이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해줬을 것도 같아요.”
― 영화 <독전> <낙원의 밤>, 드라마 <어느 날>까지 캐릭터가 확실한 인물을 선택해왔어요. 그런 점에서 한수는 좀 의외였어요.
“그래서 걱정이 많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노희경 작가님을 믿었어요. 그분이 사랑받았던 글들이 있으니까요. 사실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더 힘들어요. 최근 센 역할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대본을 보면서 한수의 일상적인 부분들이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동안은 캐릭터에 어떤 설정을 넣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한수는 제 안에서 오히려 덜어내야 했거든요.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연기는 덜어내야지 사람들한테 많은 울림을 주는 것 같다는 걸. 연기는 계속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미세한 표정 연기였어요. 한수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잖아요. 여러 가지 혼란스런 감정을 한 얼굴에 담는 연기는 정말 힘든데, 한수는 늘 그래요. 2부 바닷가에서 하늘을 보는 표정은, 와~ 감탄했어요.
“그래서 심플한 대본이었는데도 정말 많이 봤어요. 한수는 더 나가면 안 되는 인물이어서 걸음걸이나 동작 등에서 어느 정도 선을 정해놨어요. 그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그걸 넘어서면 안 됐어요.”
― 테두리? 예를 들면요?
“한수는 씩씩하면 안 됐어요. 동창들을 만나서 즐겁더라도 씩씩해 보이면 안 된다. 한수가 누굴 만날 때 반갑기는 하지만 너무 반가워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안 반가운 것도 아니고,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은희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한수는 어릴 때 꿈이었던 농구를 하고, 은희는 노래를 부른다. 현실의 무게를 벗고 웃는 두 사람. 연기 호흡이 잘 맞다. 티브이엔 제공
― 한수는 은희한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목포 여행을 가면서 입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주잖아요. ‘폭스짓’인지, 아니면 한수의 진실한 감정이었을까요?
“저도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어요. 여러 사람한테 물어보기도 했고. 전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사랑 이런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은희를 생각하는 마음. 처음엔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싶어서,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은희한테 잘하고 싶었던 거지만, 그럴수록 창피한 거죠. 한수도 은희가 자신한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도 알고 있고. 그게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지는 거죠.”
― 그렇다면 은희가 친구들 연락을 받고 결국 알게 되잖아요. 만약에 은희가 끝까지 몰랐다면, 한수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까요?
“그 감정에선 한수는 못했을 것 같아요. 은희가 어떤 친구인지 잘 아는 상황에서 한수는 말하지 못했을거에요. 추억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냥 또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라 생각해요. 여행하는 동안 은희가 계속 이야기하잖아요.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왔을 때 여기서 뭘 했고 저기서 뭘 했고. 한수한테도 좋았었던 화양연화였으니까. 그때의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더 안 되는 거죠.”
― 이정은 배우와 호흡이 잘 맞더라고요. 잘 어울렸어요.
“이번에 연기는 처음 같이 했어요. 상대 배역이 이정은씨라는 걸 알고 너무 좋았죠. 같이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촬영을 안 할 때도 일상 생활에서도 제주도 방언을 썼어요. 그 인물과 동일시 되려고 무던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한수는 자신과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은희한테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괴롭다. 차승원의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 연기가 돋보인다. 티브이엔 제공
― ‘한수와 은희’편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김우빈과 이병헌 등 한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배우들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처럼 나오는 걸 새롭다고 해요. 특히 차승원과 이병헌이 함께 등장하는 노래방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아요.
“하하. 주변에서 그 장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재미있었나 봐요. 그 장면을 온종일 촬영했어요. (춤 종류는 대본에 있던?)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서 한 거죠. 전 알아서 테이블에 올라 갔고, 기차 춤도 우리끼리 알아서 췄어요. 하하.”
― 춤을 그냥 막 추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한수의 어떤 점을 담은 게 있나요.
“한수는 은행 지점장까지 됐는데 그동안 영업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노래하는 정도는 기본적으로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춤을 현란하게 잘 추거나 그러진 못할 거라 생각했고. 한수가 테이블 위에서 추는 춤은 주유소 풍선 인형이 날리는 모습이에요. 동창회지만 한수는 영업으로 간 거기도 하니까.”
― 그런 걸 생각하면 짠하기도 해요. ‘한수와 은희’편은 친구란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했어요. 은희의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돈 많은 나도 챙기고, 돈 없는 한수도 챙겨야지.” 나이 들면 순수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생각해 보니 그런 친구를 한수는 소중한 내 친구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한수와 은희를 통해 영원히 순수한 친구도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각자의 목적을 갖고 만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수와 은희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줬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촬영하면서 저도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한수와 은희가 목포를 떠올리듯 저도 제주를 떠올릴 것 같아요. 노희경 작가님과 좀 더 긴 작품에서 해보고 싶어요.”
―오티티로 쏟아지는 새롭고 다양한 장르를 뚫고 <우리들의 블루스>가 인기에요. 따뜻한 작품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변하지 않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장르가 다양해지고 놀라운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빠른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그리워하고 따뜻함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잘 다루는 노희경 작가님이고. 노희경 작가님은 시청률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오르지 않을까 해요. 이 인물들을 다 다루는 건 힘든 일이지만, 보석 같은 글을 쓰는 작가와 그 글을 잘 빚어내는 연출이 있고, 그걸 잘 표현해내는 배우들이 있으니까요. 이런 따뜻한 이야기를 더 많이 만나고 싶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