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로 ‘띄어 앉기’를 시행했던 2020년 11월 초 씨지브이(CGV) 극장 내부 모습. 씨지브이 제공
코로나 팬데믹으로 붕괴 위기에 처한 영화업계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회생을 위한 대책 마련을 잇따라 촉구하고 있다. 영화 제작자를 비롯해 극장업계, 독립예술영화계 모두 포괄적 제작 지원과 손실 보상 등을 요구하는 한편,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문화정책 기조 유지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등도 당부한다. 이들은 “케이(K)콘텐츠의 전세계적 유행이라는 현상 속에서 역설적 위기를 맞은 한국 영화의 재기를 위해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15일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주최로 서울 중구 엘더블유(LW)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산업 위기 극복 방안 토론회’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사 직전까지 몰린 영화 현장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나온 자리였다. ‘영화산업 수익성 악화와 위기 극복 방안’을 주제로 발표한 이화배 스튜디오디에이치엘 이사는 “지난 10년 동안의 극장 매출과 영화산업 매출 추이를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며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지난 3년 동안 이뤄진 극장 매출 절벽은 전체 영화산업 매출 급감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코로나로 시장이 성장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매출액을 합쳐도 전체 영화산업 매출액은 늘지 않는다”며 “영화산업의 극장 매출 비중(2019년 기준 75%)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극장산업의 매출 회복이 영화산업의 회복인 이유”라고 했다. 오티티 시장이 성장해도 극장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영화산업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날 토론회에선 한국 영화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티티 집중 육성 방침에만 힘을 쏟는 새 정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창작자와 제작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기 힘든 지금의 오티티 수익분배구조에서 오티티의 성장이 곧 한국 영화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당장 지원이 시급한 영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코로나19 장기화로 기대작들의 개봉이 잇달아 지연·취소되면서 극장가가 침체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볼 영화가 없어서 극장을 찾지 않고, 제작·배급사는 관객이 찾지 않으니 개봉을 미루는 일이 반복된다. 토론자로 나선 김동현 영진위 위원은 “현재 개봉을 기다리는 한국 영화가 100여편이다. 이 영화들이 다 개봉하려면 1년에서 1년 반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의 변화가 ‘영화는 오티티에서 보면 된다’는 식으로 고착될까 걱정이다. 한국 영화 살리기, 극장 살리기 캠페인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미뤄진 영화들의 개봉을 위해선 제작·배급사를 대상으로 제작비 지원과 매출 일부 보전 등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날 사회를 본 김선아 영진위 부위원장은 “중소 영화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배급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무너진 영화 제작 기반을 다시 마련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고 했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중구 엘더블유(LW) 컨벤션센터에서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한 ‘한국영화산업 위기 극복 방안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오는 25일부터 극장 내 음식물 섭취가 가능해져 그나마 숨통이 트인 극장업계도 손실 보상 등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황재현 씨지브이(CGV) 팀장은 “코로나19 손실 보전은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기업에 대한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며 “임대료·관리비·인건비 등 막대한 고정비 지출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영화관에 고정비를 직접 지원하고 저리 장기대출을 지원하는 등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수정 롯데시네마 책임은 “그동안 극장 내 취식이 허용되지 않아 음식물 납품 중소기업이 도산하는 등의 피해도 속출했다. 방역수칙 준수에 따른 관련 산업의 연쇄 피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박기용 영진위원장은 “오늘 제기된 다양한 의견을 적극 반영해 지원이 다각화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비판과 제안을 정리해서 실현 가능한 액션 플랜에 대해 다시 논의하는 자리를 곧 만들겠다”고 밝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관객 발길이 끊긴 서울 시내 한 영화관 모습. 연합뉴스
이들의 바람대로 극장이 되살아나면 상시적 위기에 놓인 독립예술영화계의 사정도 나아질까.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배장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한국 영화 최대 매출을 기록한 2019년은 시장편중도가 가장 극심한 해이기도 했다”며 “다시 2019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앞으로도 독립예술영화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도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앞으로는 텐트폴(대작) 영화들이 개봉해도 1천만 관객이 드는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양극화와 독과점 해결이 중요하다. 다양성을 담은 영화들이 상생할 수 있도록 창작자들에 대한 보호·지원과 함께 독립예술영화전용관 확대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1일 한국독립영화협회는 독립영화 분야 10대 요구안을 담은 ‘새 정부에 바라는 독립영화 정책제안서’를 발표한 바 있다. 제안서에는 △독립영화 창작자와 문화예술 노동자에 대한 공정계약·보상 제도와 사회적 안전망 구축 △코로나19 긴급지원 전폭 실시 △영화·영상 분야 시장 독과점 규제 및 독점 이익에 대한 사회적 환수 정책 마련 △피해자가 주체가 되는 영화계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 △지역영화 활성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박근혜 정부에서 작성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내역. <한겨레> 자료사진
보수 정부의 집권을 앞두고 지원도 중요하지만 표현의 자유 보장과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의 기조 유지 등을 당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영화 제작자 ㄱ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표현의 자유가 모든 문화의 토대라고 생각한다”며 “문화정책을 좌나 우로 나눠 블랙리스트 같은 걸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 또 반복돼선 안 된다. 문화는 내버려둘 때 성장할 수 있다. 지원한다고 간섭하면 시장이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