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이 29일 오전 전주 완산구 고사동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진행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기자회견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첫 단편영화 <심장소리>를 들고 전주를 찾은 이창동 감독은, ‘활기’라는 단어를 여러번 반복하며 팬데믹 이후 한국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 감독은 29일 오전 전주 완산구 고사동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진행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이창동 특별전: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기자회견에 문석 프로그래머와 함께 참석해 자신의 영화세계와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애정, 한국 콘텐츠에 대한 자부심 등을 나타냈다.
이날 이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특별전을 개최하는 소감을 묻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정상적으로 영화제를 열게 됐는데 내 특별전이 영화제를 살리는 데에 어떤 구실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는 영화 산업의 활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영화인이 전주국제영화제를 주목하고 있고, 영화인들이 관객을 고맙게 생각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어 “내 전작은 누군가에겐 봤던 영화일 거고, 젊은 관객들에겐 처음일 수 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며 “리마스터링한 작품을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는데, 극장에서 모두 볼 계획이다. 창작자는 혹평이든 호평이든 신경 쓸 수밖에 없는데, 이번 기회에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기대했다.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은 이 감독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특별전이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창동에 관한 신작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이창동 감독의 신작 단편 <심장소리> 및 이 감독의 영화 전편 등 총 8편이 상영된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이창동 감독의 단편 영화 <심장소리>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제공
특별전에서 최초 공개되는 <심장소리>는 이 감독의 첫 단편으로 세계보건기구(WHO)의 요청으로 만들게 된 영화다. 그는 “세계보건기구에서 나를 비롯한 몇몇 감독에게 우울증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그걸 묶어 하나의 옴니버스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라며 “다른 감독들이 다 정해진 후에 내가 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영화 완성은 내가 제일 먼저 했다. 내가 원래 다른 감독에 비해 영화 만드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 이번에는 이상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계속 미뤄지다가 이번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한다고, 공개하자고 말했더니 그쪽에서 받아들여 줬다. 최선을 다해 찍었기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심장소리>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를 구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타워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둔 소년의 ‘심장소리’를 통해 삶의 의지를 말하는 작품이다.
이 감독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도 이번 특별전에서 주목할 부분. 이 감독은 자신이 다큐의 대상이 되는 게 처음에는 불편했다고 했다. 그는 “팬데믹 상황 때문에 마자르 감독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해,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작업했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더 불편하게 된 것”이라고 웃어 보이며 “마자르 감독이 장소도 직접 보지 못한 상황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내가 대상자라 감독으로서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더라”고 했다. 다큐 촬영을 위해 과거 자신이 영화를 촬영한 장소에 다시 방문한 이 감독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별로 안 변할 데를 찾아서 그런지 모르겠다”고 떠올렸다.
29일 오전 전주 완산구 고사동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진행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창동 감독과 문석 프로그래머(왼쪽부터). 오승훈 기자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선 “난 198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다. 1980년대는 현실의 압박이 강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며 “창작자로서 그 현실을 어떻게 반영할까 본질적으로 고민했다. 그게 영화에서도 나름대로의 정체성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쉽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크게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질문이 오래 남고 자신의 삶의 보편적 의미와 연결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품 활동의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는 “원동력이 있다면 80년 광주의 기억일 것.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1983년 소설 <전리>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활동했다.
특별전의 타이틀인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에 대해서는 “내가 지은 게 아니지만, 내 영화를 관통한다. 영화는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며 “보여주는 매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부분인데, 그게 내 영화의 특징”이라고 했다. 함께 자리한 문석 프로그래머는 “특별전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감독인 이창동의 특별전을 열게 돼 큰 영광”이라며 “영화제는 최초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번 특별전은 최초를 기록할 수 있는 장이 됐다”고 했다.
‘이창동 특별전: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제공
이 감독은 “<초록물고기>가 밴쿠버 영화제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해외영화제에 갔었는데 당시엔 한국영화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며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역할을 하지만 그때는 밴쿠버 영화제가 유일하게 아시아 영화를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하던 때였다. 중국과 일본, 홍콩, 대만, 이란, 중동 쪽 나라 영화들은 관심이 있는데 한국영화는 마치 태국(타이)이나 필리핀 영화, 베트남 영화들처럼 관심이 없었다”고 데뷔 초기 느낀 한국영화의 위상에 대해 회상했다. 이어 “이후 25년 뒤 한국영화가 엄청나게 발전했다. 지금은 해외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을 짜지 못하면 영화제가 능력이 없는 것처럼 됐다.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한다. 이런 한국영화의 활력을 이루는데 한쪽 귀퉁이에서 같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롭다”고 덧붙였다.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그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며 “부산·부천·강릉 등 한국의 다른 대표적인 영화제들도 자기 정체성을 잘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 전주영화제의 정체성이 가장 의미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지금까지 전주영화제가 가장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사회의 질문을 발견해내는 영화제로 잘 성장해온 것 같다”며 “앞으로도 이런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 감독은 또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열린다”면서 “축제성을 회복해 영화를 향유하는 관객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활기를 잘 끌어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특별전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에서 상영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제공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극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선 “오티티에서 쇼핑하듯 영화를 볼 수 있는, 보다가 지루하면 빨리 돌려버리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영화들이 아니라, 영화에 나를 맡기고 느끼면서 같이 경험하는 그런 영화들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영화는 어떤 매체보다 다른 인간의 삶과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며 “인류가 이런 매체의 본질적인 힘을 사라지게 할 일은 없고, 또 그러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는 “나 역시 오티티 쪽으로부터 (영화 연출) 제안을 여러 번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며 “꼭 오티티라서 안 하는 건 아니고, 할 만한 이야기라고 판단한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 하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그는 “분명한 메시지, 쉬운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한다”며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고, 삶과 영화가 연결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다. 어떤 관객이든 계급이나 환경을 넘어서 개개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지난 28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열흘 동안 전주 고사동 일대 5개 극장 19개 관에서 진행된다.
전주/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