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예능아, ‘요린이’라 부르지 말아줄래?

등록 2022-05-05 12:22수정 2022-05-05 13:45

‘~린이’ 아동비하 표현인데 ‘골린이’ ‘헬린이’ 등
TV 예능 자막, 출연자 입으로 계속 언급
“‘어린이’ 용어 웃음 위해 판 언어도단적 행위”

“구력은 3~4개월 정도 됐다. 골린이다. 필드는 거의 안 나가봐서 오늘이 데뷔전이나 마찬가지다.”

지난달 30일 방영한 <에스비에스>(SBS) 예능프로그램 <편먹고 공치리>에 출연한 트로트 가수 정동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화면에는 ‘자타공인 골린이’라는 자막이 달린다. 골린이? 언뜻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마이 프레셔스~”라고 외치던 골룸이 떠오른다. ‘골린이’는 ‘골프’와 ‘어린이’를 더한 말로 골프를 잘하지 못하는 초보에 빗댄 단어다.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골린이’의 처음은 ‘요린이’었다. 2020년 <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문화방송)에서 참가자들한테 ‘요린이’(요리+어린이)라고 부른 것이 예능프그램에서 ‘~린이’를 사용한 시작이었다. 당시 진행자였던 백종원 요리연구가가 “요린이들 요리를 멈추지 마세요!”라고 외치면 요린이들은 한결같이 “네!”라고 답했다. 매주 30~40여명의 요린이들이 영상을 켜고 백종원 연구가를 만났다.

<백파터>로 요리 연습을 했다는 한 시청자는 “그때 요린이라는 단어는 아주 귀엽게 느껴졌다. 실수하고 서툴어도 예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해석됐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후 ‘요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요리 블로그 제목이 많아졌다.

지난달 방송
지난달 방송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어린이의 인격을 비하하고 있었다는 사실!

‘~린이’는 아동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단어다. 지난 3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공기관의 공문서, 방송, 인터넷 등에서 ‘~린이’라는 아동 비하 표현이 사용되지 않도록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 점검 등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여러 분야에서 ‘~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동을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라며 “이런 표현이 방송이나 인터넷 등에서 확대·재생산됨으로써 아동들이 자신을 왜곡·무시하고 비하하는 유해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차별적 표현이라는 의견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지난해 교보문고가 유튜브 채널에서 한 ‘‘~린이’ 사용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674명)의 31%는 부정적, 26.2%는 긍정적으로 봤다. 부정적인 의견 중에는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는다.” “무력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등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지난달 방송
지난달 방송

특히 예능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이 즐겨보고 유행어 등을 따라한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채널이 많아지고 플랫폼이 늘면서 예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주식프로그램에서는 ‘주린이’, 등산프로그램에서는 ‘등린이’까지 등장했다. 더 큰 문제는 <자이언트 펭수> 같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방송> 프로그램에서 조차 ‘헬린이’같은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자이언트 펭수>는 아이들에게 운동하자는 콘텐츠는 내보내면서 펭수를 ‘헬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케이블 방송사 피디는 ‘~린이’가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에 대해 “방송의 경우 당시 유행하는 언어를 자막으로 활용한다. ‘~린이’ 초보자를 귀여운 느낌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이기도 하다”고도 말했다.

어린이 비하 뜻이 있는 걸 모르는 어른들이 많아서 방송인들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면서 예능이 나쁜 단어를 널리 알리고 있다. 한 지상파 출신 관계자는 “일베 용어인지 모르고 사용해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듯이, ‘~린이’ 역시 모르고 사용하다 보면 언젠간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방송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언어는 의식의 반영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린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지 않는 우리 사회가 문제이고, 그만큼 예능프로그램 제작진이 웃음 앞에 비굴하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며 “초보자의 미숙함을 예능적으로 귀엽게 표현한다는 의도겠지만, 방정환 선생이 아동을 존중하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값싼 웃음을 위해 헐값에 팔아넘기는 언어도단적 행위임을 인식하고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1.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중증외상센터, 원작 소설 초월…주지훈 배우는 말 그대로 만찢남” 2.

“중증외상센터, 원작 소설 초월…주지훈 배우는 말 그대로 만찢남”

16살 박윤재, 로잔 발레콩쿠르 우승…한국 남자 무용수 최초 3.

16살 박윤재, 로잔 발레콩쿠르 우승…한국 남자 무용수 최초

조선시대 자수 병풍의 발견…괴석과 모란 위에 박쥐가 날아다니네 4.

조선시대 자수 병풍의 발견…괴석과 모란 위에 박쥐가 날아다니네

‘해뜰날’ 가수 송대관 유족 후배들 슬픔 속 발인 5.

‘해뜰날’ 가수 송대관 유족 후배들 슬픔 속 발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